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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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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8,22)
‘벳사이다’의 뜻 그들은 안드레아와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 벳사이다에 갔습니다. ‘벳사이다’는 ‘어부의 집’이라는 뜻입니디, 그들은 바로 이 집으로부터 온 세상에 어부로 파견되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십시오. 역사적 사실이 분명하고, 문자적 의미도 명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영적 의미를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분께서 벳사이다에 가셨다는 사실, 거기서 눈먼 사람을 만나셨다는 사실, 그리고 떠나셨다는 이 모든 사실 가운데 특별한 것이 있습니까?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참으로 특별하지만, 그때에 그분께서 행하셨던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날마다 되풀이되지 않는 까닭은 우리가 이런 일을 더 이상 특별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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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모세야, 내가 화내는 것을 내버려 두어라"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느님이 화를 내시는가?” 우리가 행복을 잃어버릴까봐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복과는 정반대의 길로 행할 때, 하느님ㅁ은 대단히 섭섭해하십니다. 하느님께는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 곧 하느님의 아드님이 순교를 당하여 죽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야, 내가 화내는 것을 내버려 두어라” 하신 말씀에 다시 한 번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 선한 사람이 하느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의지를 언제나 하느님께 완전히 복종시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느님을 단단히 붙잡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느님은 그 사람이 바라는 것만을 바라십니다. 자기의 의지를 완전히 포기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의 의지를 보답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의지는 그 사람의 의지가 됩니다. 하느님은 그 사람이 바라는 것 이외의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하십니다. 하느님은 먼저 하느님의 것이 되지 않은 사람과는 절대로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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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5-8장
<생태 문화 주간> 음악/미술/독서 등. 생태 품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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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1절: “아비뇽 유배”와 서구 대이교
서구 대이교:
합법성의 문제는 오늘에 이력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고, 또 그것은 영구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을 것이다. 성인들도 양측에 다 있었는데, 예컨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는 우르바노 6세에게만 합법성을 단호하게 보증하였고, 청렴한 속죄 설교가인 빈첸시오 페레르는 클레멘스 7세만의 유효성을 강력하게 보증하였다. 두 교황은 자신의 합법성과 상대방의 비합법성을 너무나 깊게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교황권을 방어하고 반대자와 싸우는 것이 하나의 진지한 양심적인 의무라고 인식하였다. 그후 교회에 일치의 길을 터놓기 위하여 자진해서 교황위를 단념한다는 그들에게 자주 제시된 요구에 대하여, 그들은 “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들의 양심적인 확신에서 순수하게 유지하도록 하느님 앞에서 의무로 지워진 사도 계승의 진정성과 유효성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40년 동안이나 지속되고 거의 극복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이 이교의 지속성과 완고함은 이렇게 셜명된다. 우르바노 6세와 마찬가지로 클레멘스 7세도 각기 교황청을 설치하였고 또 그들의 사후에 후계자들이 있었다. 로마계는 우르바노 6세(1378∼1389), 보니파시오 9세 (1389∼1404), 인노첸시오 7세(1404∼1406), 그레고리오 12세(1406∼1415)로 구성되고 아비농계는 클레멘스 7세, 베네딕토 13세로 구성되어 있다. 분열의 결과는 무서운 것이었다. 그리스도교계 전체가 두 복종파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각 교황은 각기 상대방의 지지자들을 파문하였다. 누구도 이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사실상 전 그리스도교계가 파문 상태에 있었다. 이 분열은 모든 국가와 교구 그리고 본당에 침투되었다. 양쪽 교황이 그때마다 자신의 후보자를 임명하고 모든 직무와 교회록이 이중으로 점령되어 있어 불화와 싸움을 일으켰고, 그것은 교회를 일찍이 체험한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제도의 위기로 이끌었다.
파리 대학은 마침내 1394년에 이 이교를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길을 제안하였다. 그것은 양보 방안(자발적인 사임), 합의 방안(중재 재판에 교황들의 복종), 공의회 방안(공의회를 통한 결정)이었다.(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