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집회서는 가히 친구론(親舊論)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앞부분만 보면 명심보감 같은 데서 하는 얘기가 아닐까 생각할 정돕니다.
아무튼 친구는 중요하고 그래서 잘 사귀어야 합니다.
오늘 집회서 말씀이 아니더라도 친구 잘못 사귀면
자기 인생도 망치고 패가망신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면담하다 보면 자기 아들이 참 착한 아들인데 친구 잘못 만나
나쁜 짓을 하게 되었다고 하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부모가 된 입장에서 자기 아들의 잘못을
아들 친구 탓으로 돌리려는 비겁함이랄까 무책임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그런 친구를 친구로 택한 것부터 끊지 못하고 계속 사귄 것이 아들이지요.
이는 마치 책을 만드는 것이 사람이지만 책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는 것과 같지요.
책방에 가서부터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고르는 것까지 내가 잘해야 하는 거지요.
이런 뜻에서 오늘 집회서의 앞부분은 다른 가르침과 별로 다르다고 할 수 없고
그래서 별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끝부분은 신앙인의 친구 선택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고
자신의 우정을 바르게 키워 나가니 이웃도 그의 본을 따라 그대로 하리라.”
이 말씀을 쉽게 풀이하면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교회 친구와 사귀고,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도 신자 가운데서 찾음으로써
신앙생활을 같이 이어가고 서로 신앙의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면에서 개신교 젊은이들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심하면 할수록 자기와 신앙이 다른 사람과 사귀지 않으려 하고,
많은 시간을 교회 안에서 같이 보내는데 그것도 꼭 같은 교회 안에서 보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런 친구 관계가 오늘 복음이 얘기하는 결혼 관계로
이어지고 자녀 관계와 자녀 교육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기준으로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기준으로 친구와 배우자를 택했기에
배우자를 자기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이 짝지어주시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지요.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볼 때마다 제가 놀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들의 교리와 하는 짓을 제가 좋게 보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배우자의 선택을 교회에 맡긴다는 것은 사실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의 싫고 좋고가 없으며,
자기의 싫고 좋고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뜻에 따라 부부의 인연이 맺어졌기에 하느님 뜻에 따라 살겠지요.
물론 이 얘기는 신자하고만 친구를 사귀고 결혼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신자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있고, 그런 열린 자세로
신자 아닌 사람을 사귀어 하느님께로 인도하면 더 적극적이고 좋겠지요.
저의 육신의 형제들을 보면 한 명만 빼고 신앙이 없거나 다른 신앙인과
결혼했지만 지금은 다 가톨릭 신자로 살아가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으니
좋은 결과를 냈다고 할 수 있는데 관건은 그래도 신앙이 중심이었던 거지요.
그러므로 오늘 얘기하는 친구 관계나 부부관계는
갈수록 하느님이 중심과 기준이 되지 못하고
자기의 싫고 좋음에 따라 선택하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성찰을 하게 합니다.
자기의 싫고 좋음이 기준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사랑에서 멀며 하느님 사랑에서는 더 먼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