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아홉째 날: 하나의 “작은 규칙”
이 시점에, 당신은 자신의 작은 기도 규칙에 무엇을 포함시켰는가? 이 규칙 안에서, 무엇이 당신을 가장 영적으로 들어가도록(참여하도록) 하는가? 당신의 삷에서 하느님에 대한 감을 향상시킬 수 있는(그리고 당신의 ‘작은 규칙에 첨가할) 다른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첨언) 마르틴 부버는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성 안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관계 맺음이 ‘나와 너’, ‘나와 그것’에 따라 우리의 삶의 자세와 세계관과 하느님관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와 너’ 관계 맺음의 양식과 ‘나와 그것’의 관계 맺음의 양상은 현실에서 따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라 합니다. 우리 삶이 ‘나와 그것’의 관계 양상에서 ‘나와 너’의 관계 양상으로 넘어가고, 이 둘 사이의 소통과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의 삶은 다채로워지고 깊어질 있습니다.
‘나와 그것’의 삶의 양상에서, 그것은 나의 그것으로(소유격적인 의미)를 지니며, 나와 그것은 분리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것에는 물건도 포함되고 고차원적인 사상이나 신학, 종교까지 포함됩니다. 우리의 신앙적 자세에서 ‘나의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하느님은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이거나 나의 기대를 채워주시는 분이 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과 나는 분리된 상태에 있습니다. 그분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내가 친밀감을 느낀다고 하여도 말입니다. 이 ‘나와 그것’의 양상에서, 우리는 그것과 보다 직접적인 만남과 유대가 일어나기가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나를 위한 움직임, 나를 살리려는 움직임을 하지만 종국적으로 나와 그것은 살아나지 못합니다.
‘나와 너’의 삶의 양상은 (먼저) 나와 마주 선 너에게로 내가 녹아들어 가는 과정이고 또한 너와의 관계에서 내가 살아나고 너가 살아납니다. 우리들은 관계적일 수밖에는 없고 나의 본연의 모습은 너를 통해서 만나집니다. 특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신 당신은 보여지는 나와의 관계성 속에서 보여지고 들려지고 만져집니다. 이 ‘나와 너’의 관계성 속에서 언뜻보기에는 너에게로 향하는 나의 녹아듦은 죽음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 안에서 하느님은 살아나고 생명이신 하느님 안에서 나 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신 너와의 관계 맺음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관계 양상을 내비치는 글들을 남겼습니다. 그 가운데에 프란치스코가 라베르나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남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프란치스코가 더 병약해지면 썼던 ‘피조물 형제의 노래’가 저에게 강하게 다가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당신(Tu)’로 칭합니다. “당신은 애정이시며 사랑이시나이다. 당신은 지혜이시나이다. 당신은 겸손이시나이다. …” 이 당시 프란치스코에게 하느님은 사랑, 지혜, 겸손과 따로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너인 사랑과 너인 지혜와 너인 겸손과 따로 있지 않고 그 속에 잠겨있습니다. 이 속에서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만나고, 드러난 하느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초대하고 이끌고 있습니다.
‘피조물의 노래’에서 프란치스코는 ‘당신’이라는 칭호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자신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마주 선 하느님을 만나고 있고, 프란치스코는 이 ‘나와 너’의 관계 세계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 주님, 당신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찬미받으시옵고, 그 가운데 각별히 주인이신 해님 형제와 더불어 찬미받으소서. 해님은 낮이옵고, 그로써 당신께서 저희를 비추시나이다. 아름답고 장엄한 광채로 빛나는 해님은, 지극히 높으신 당신의 모습을 지니나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하느님과의 ‘나와 너’의 관계 양상에 의해 우리들이 살아나는 여정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