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주셨네.
주님의 눈은 의인들을 굽어보시고, 그분의 귀는 그 부르짖음 들으신다.
보통 독서나 복음을 가지고 묵상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오늘은 처음으로 화답송을 가지고 묵상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화답송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굽어보시고,
우리 부르짖음을 들어주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청하면 우리 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다 들어주신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런 반성을 합니다.
주님과 저 사이에서 누가 더 잘 들을까?
원칙은 제가 더 잘 들어야 하는데 실제는
주님께서 제 청을 더 잘 들어주실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더 잘 듣는 법입니다.
어머니와 아들 가운데 누가 더 잘 듣나요?
어머니가 더 잘 듣잖습니까?
언젠가 장가 안 든 늙은 아들을 데리고 사는 어머니의 푸념을 들었습니다.
골자는 아들이 실은 아들이 아니라 웬수라는 말입니다.
가라는 장가는 가지 않아 꼴 보기 싫은데,
노상 엄마 물! 엄마 밥!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안 그러는데 이놈의 아들이 종처럼 부려 먹는다고,
장가들면 제 아내한테는 그러지 못할 거면서 당신한텐 그런다는 겁니다.
그런데 원래 그런 것입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주고
덜 사랑하는 사람의 요구가 많은 법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과 우리 사이가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계속 이렇게 가도 되는 것입니까?
또 이렇게 계속 사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이런 우릴 계속해서 용납하실까요?
계속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면 우리도 하느님 말씀을 들어야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고 더 나아가 우릴 행복하게 할 것이며,
반대로 듣지 않으면 우리는 불행하게 될 것임을.
어린아이는 먹는 것 때문에 자주 엄마와 실랑이를 벌입니다.
엄마가 먹으라고 주는 건강한 음식은 먹지 않겠다고 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해로운 것을 굳이 먹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숙하고 지혜롭다면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불행해지는 청은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다 우리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그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결국은 우리가 불행해진다는 것을.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고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기를 빈다고 해서
아버지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생색을 낼 것이 아닙니다.
뒷부분의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 나를 위한 것이고,
이 세상의 일용할 양식보다 우리에게 더 유익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하느님께 달라는 기도는 안 할 거야 하며
교만 떨지 말고 다만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것을,
실로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주십사고 현명하고 성숙하게 기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