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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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32)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
이 말씀은 교회의 신비를 분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교회의 양 떼가 온 세상으로 흩어집니다.
회개를 통해서 니네베에 이르고(요나 3,5 참조) 지혜에 대한 갈망으로 남방 여왕에게까지 미칩니다. 그리하여 평회를 이루는 솔로몬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참조: 1 열왕 10,2; 2역대 9,1). 여왕의 나라는 갈라지지 않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몸으로 만듭니다. 그 위대한 성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연관된 것이며(에페 5,32 참조) 그 실제는 예시되었던 것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제 그 신비가 진리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때는 솔로몬이라는 표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육신으로 여기 계십니다.
-암브로시우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우리가 짐을 버리고, 하느님이 고통을 젊어지게 하는 것 외에는 하느님이 짐을 짊어질 길이 없다. 우리의 하느님은 고통을 짊어질 수 있고, 능히 짊어지는 하느님이다.
고통이 제아무리 크다고 한들, 그것이 하느님을 통해서 온 것이라면, 하느님이 먼저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닥친 고통이 제아무리 하찮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것을 하느님 안에 두기만 한다면, 그 고난은 필경 그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니, 약간 불편하더라도 시험 삼아 그렇게 해 보십시오.
쉬르만은 엑카르트의 고난에 대한 가르침을 이렇게 설명한다. “고난을 ‘처녀’ 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난을 하느님에게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 하느님은 위로자인 것만이 아니다. 하느님은 더 이상 고난의 ‘원인’ 이 아니라 고난의 당사자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고난을 되돌려 보냄으로써 기쁨을 맛보고, 영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정을 경험한다. “마음의 평정이야말로 사람을 (하느님의) 아들로 만들어 준다. 병이 났는가? 건강을 받아들이듯이 병을 즐거이 받아들이고. 병을 받아들이듯이 건강을 즐거이 받아들여라.” 엑카르트는 “하느님이 흡족해하고 있으니, 안심하라”고 조언한다.(348)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전사(前史):
양 교황을 거슬러 공의회의 길로 가는 데 사람들이 오랫동안 저항한 것은 이해할 만하다. 결국 양편 복종파에서 13명 추기경들이 자신들의 상관의 뜻을 거슬러 1409년 3월 25일에 공의회를 피사에서 소집하기로 합의하였을 때, 그 모험은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100명의 주교들이 모였고, 또 100명 이상의 주교들은 전권을 가진 대표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또 200명 이상의 수도원장과 주교좌 참사회원, 그리고 대학에서 전권을 위임받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에 이 회의는 고무되어 양 교황에 대한 소송을 진행하고 그들을 교회일치의 적으로, 다시 말해 이단자로 선언하고 폐위를 선언하였다. 그러고 나서 회의는 새 교황을 선출하였고, 그는 알렉산데르 5세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듬해에 사망하고 평판이 매우 나쁜 코사 추기경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을 요한 23세라고 명명하였다.
당시의 법 해석에 의하면 피사 공의회와 그 행동이 법적으로 유효하였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에 따라서 알렉산데르와 그의 후계자는 다른 두 교황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이었다. 그러나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도, 그의 상대자인 아비용계 베네딕토 13세도 배제되려 하지 않았다. 결국 불행하게도 이제 세 명의 교황이 있게 되었는데, 그들 각자는 마찬가지로 합법적이거나 비합법적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 물론 교회법학의 규정에 따라 그레고리오와 베네딕토는 해임되었으므로, 공의회에서 선출된 교황 알렉산데르에게는 자신의 지위를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대가 있었다. 처음 두 교황의 복종파들이 크게 줄어든 반면, 알렉산데르는 그리스도교계에서 최대의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었다.(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