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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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미움으로 자신을 고립시킨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 분노에서 살인이 태어나고 욕정에서 간음이 태어나는지 보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원수에 대한 미움은 친구 사이의 사랑으로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원수로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분의 자비심에 그가 흔들렸다고 합시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를 친구로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 원수보다 우리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원수가 남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자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미움은 어두운 곳에서 태어난 괴물입니다. 그것은 가는 곳마다 건전한 생각의 아름다움을 더럽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원수를 소중히 여기도록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서 나쁜 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십니다. 모세 율법은 원수에게 신체적 해를 입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원수를 미워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단지 그를 미워하기만 해도 여러분은 그의 육체에 대해서보다 여러분의 영에 더 큰 혜를 입힙니다. 여러분이 원수를 미워하더라도 그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여러분 자신을 휘저어 놓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니 원수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자보다 여러분 자신을 살린 것입니다. 그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그자보다 여러분 자신에게 더 이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미완성 작품-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6
의지를 버려라
모세는 그의 하느님 야훼께 애원했다(탈출 32,11).
내가 다른 이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은 구채적인 개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만이 아니라 인성을 상하게 한 것이다. 인성을 상하게 하는 것은, 한 개인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대표인 그리스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과 같다. 신비스런 공동체는 한 개인이 기뻐 뛸 때 함께 기뻐 뛰고, 한 개인이 괴로워할 때 함께 괴로워한다.
아집을 버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 하나 됨을 깨달을 수 있는 비결이다. 모세는 기꺼이 그렇게 하려고 했다. 즉. 그는 자기 백성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의지를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먼저 하느님 앞에서 자기 의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인성 자체는 대단히 고귀하다. 왜냐하면 최고의 인성은 천사들과 동격이고 신성과 친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런저런 개인의 특징을 버리고,우리 자신을 ‘인성’으로 여길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이루었던 최고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인성 그 자체는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는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천대받는 사람 속에 있는 ‘인성’ 이나 교황과 황제 속에 있는 인성이나 똑같이 완전하다. 인성이야 말로 개인으로서의 우리보다 더 사랑할 만한 대상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인격보다 ‘인성’이 더 귀중하다. 그렇다면 엑카르트라면 우리의 휘황찬란한 고립주의와 무뚝뚝한 개인주의를 버리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라는 게 있게 하기 위해 나라는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주/객 관계를 버리고 만유내재신론의 관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것을 버리고 우리의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350)


<금주간 성서읽기> 마태 18-22장
<생태 아낌 주간> 물.전기.자동차.구매와 소비


이름 없는 하느님, 김경재
하느님 신앙과 동학의 시천주
한울님을 몸으로 모신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육체 안에 한울님을 가둔다는 것이 이니다. 한울님은 특정 시공간에 갇힐 분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구체적으로 한울님을 모시는 길은 몸, 곧 나의 전체 생명 , 지정의 총체적 생명을드러내 생명의 지성소에 모시는 것이다. 그때엔 내가 모시는 것이지만 어느덧 한울님이 , 신령하신 영으로서 모시는 자의 생명 안에 내주(內住)하시며 , 나를 둘러싼 일체의 생명 현상 및 우주와 역동적 관계로 유기체적 동체(同體) 의식을 갖도록 우주 의식으로 충만하게 한다. 그때는 한울님은 우리 안과 밖과 위와 주위에 야스퍼스가 말하는 ‘무제약적 포괄자’ 로서 느껴지지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은 한울님과 떨어져서 살아 갈 수 없다는 존재론적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동학과 그리스도교의 종교 체험이 유형론적으로 통하는 점이 아주 많기에 다시 한 번 그리스도교의 신 체험과 비교한다면, 이는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신 이" (에베소서 4: 6)로 체험하는 경지와 통한다.
마지막으로 동학의 ‘강령 주문’ 미지막 구절을 음미해 보자.
“조회정 영세불망 민시지"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열 자는 앞선 열한 자 주문의 후반부를 이루면서, 한울님을 모신 자의 결과론적 존재 상태와 축복을 언급한 것이다. ‘한울님' 을 지극한 태도로서 온 생명을다하여 모시면 어떻게 되는가? ‘조화’란 요술을 부리는 신선의 술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이 되는 이치와 생명 현상이다. 자동 기계적인 인과율의 법칙성도 아니고, 초능력과 초자연이 개입히여 이루어지는 타율적인 신기함도 아니다. ‘조화’ 라는 말은 창조성과 자연 발생성이라는 두 측면이 갈등 없이 통전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내가 하는 일이면서도 나를 넘어선 우주적인 힘을 타고서 이뤄지는 일이다.(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