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너무도 엄청난 도전이고 불가능한 도전인 것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그것이 무결점 완벽주의 차원에서 완전성의 문제라면
그것은 너무도 엄청난 도전이고 불가능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버지처럼 완전해야 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완전함이고,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더 엄청나고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요?
이 또한 사실입니다.
하느님이나 하실 수 있는 원수 사랑을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원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나 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지니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원수 사랑에 도전할 때 제일 먼저 지녀야 할 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은 내 사랑으로는 할 수 없다고,
우리 사랑 능력의 가난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애를 써 1억은 벌 수 있어도 100억은 벌 수 없는 경우,
그것을 도둑질하거나 사기 쳐서 벌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니 도와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내미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하고 하느님 도움 청하는 것인데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려는 의지는 우리가 포기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할 힘 곧 애덕은 주십사고 청하는 겁니다.
애덕(Caritas/Charity)은 말 그대로 덕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랑(Amor/Love)과 다른 것으로
사랑을 할 수 있는 힘 또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는 힘인 애덕이 없는데,
애덕이 내게 없음을 우리가 겸손히 인정하면,
그리고 애덕을 지니고자 하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고 갖고 있다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 곧 만덕의 근원이신 분에게 그것을 청할 겁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덕들에게 바치는 인사’에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덕들이여,
주님께서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여러분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온 세상 사람 그 누구도 정녕 먼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여러분 가운데 어느 하나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서 모든 덕은 원천이신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프란치스코는 얘기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청해야 하는 겁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되고,
희망을 버려서도 안 되며,
열망을 가지고 주님께 청하면 됩니다.
할 수 없는 사랑을 하라고 억지 부리며 부담을 주신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그 사랑에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그 완전한 원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지 않으시고
‘그래, 너는 원수를 죽을 때까지 미워하며 살거라.’
또는 ‘너는 자기나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그 찌질한 사랑이나 하다 죽거라.’ 하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초라하고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이 고귀하고 완전한 원수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
주님 사랑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