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서 가셔서 악령의 유혹을 받으신 주님께서
오늘 사순 제2주일에는 산으로 가시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고,
그 모습을 뽑힌 제자들에게만 보여주십니다.
왜 이러신 것일까?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순시기 전례적인 의미로 볼 때 이 사건은
광야에서 유혹받으신 것과 해골산에서 돌아가신 것 사이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산으로 오르셨다가 다시 내려오신 다음
다시 골고타로 오르시어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뽑힌 제자들 뿐 아니라 우리도 따라야 할 주님의 발자취이고,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봉헌 생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크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여정은 <A Patre, ad Patrem>
곧 성부께로부터 오셔서 성부께로 돌아가시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작게 보면 그 중간에 광야-타볼산-해골산의 여정이 있고
그래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는 이 여정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성부께 갈 수 있고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산 위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은
해골산에 오를 제자들을 위해 미리 일부러 보여주신 것이고,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모될지 보여주신 것입니다.
장차 이렇게 될 희망을 가지고 당신의 십자가 길을 따르라는 뜻으로
주님께서는 뽑힌 제자들에게 이 모습을 보여주시고,
바오로 사도는 하늘 시민인 우리에게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필리피서에서
십자가를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과 하늘 시민을 대비시키며
자신과 필리피 신자들은 하늘 시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우리에게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것인가?
아니면 하늘 시민이 될 것인가? 자문케 하고 선택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답과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우리의 대답과 선택은 너무도 자명하지요.
우리가 십자가의 원수들이 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겠고 상상할 수도 없겠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십자가의 원수들이 될 수 있고,
반대로 하늘 시민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선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과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면 생래적으로 고통을 거부합니다.
인간이란 아니 모든 피조물은 고통을 거부하게끔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꽃길을 가면서 고통스럽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것이고
그것도 십자가를 지고 오르는 사람이 고통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산을 오릅니까?
산꼭대기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아, 좋다!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는 그런 산을 오르지 않고 하느님의 산을, 하늘 시민이 되기 위해 오르며,
그래서 고통을 감수하고 더욱이 주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오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이런 목적이 없으면 곧 하늘 시민이 되려는 목적이 없으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목적은 있는데 희망이 없어도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십자가만 보고 주님을 보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주님은 목적지시고 길잡이시고 동반자이시기에 희망을 주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산 위에서 변모하신 것은 이런 희망을 주시기 위함이고,
뽑힌 제자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신 것도 그들이 희망을 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희망을 보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그 희망을 주는 사람입니까?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