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요셉의 얘기를 묵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당신의 역사로 만드신다는 것이고,
서로 파괴하는 인간 역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역사로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표현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입니다.
구약에서 야곱의 자식들이 형제인 요셉을 버리는데
신약에선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마저 서슴없이 버립니다.
이는 인간이 악하게 되면 못 할 짓이 없고 버리지 않는 것이 없음을 보여 줍니다.
제 생각에 동물은 야수일지라도 잡아먹기는 해도 그냥 죽이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동물에게는 싫은 것이 없고 미워하는 것은 더더욱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버리거나 죽여버립니다.
앞에서 봤듯이 형제마저 하느님까지.
싫으면 버리고 미우면 죽여버립니다.
잘 아시다시피 좋고 싫음은 자기중심적인 감정이고,
미움은 싫어하는 것을 단지 버리는 것을 넘어 파괴하는 힘이며,
미움이 극에 달하게 되면은 죽여버리기까지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또 볼 수 있는 것은
싫은 감정과 미움의 힘이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집단화한다는 점입니다.
창세기에서는 형제들이 싫어하는 감정을 공유하며
요셉을 버리자고 더 나아가 죽이자고 공모하고,
복음에서는 소작인들이 힘을 합쳐 주인에게 대듭니다.
공동선을 위해 합력선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악한 짓을 힘을 합쳐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서 집단 폭력이 발생하는데
거의 모든 악이 이렇게 집단화하고
이런 집단화에는 반드시 주모자와 공모자가 있습니다.
히틀러라는 인간이 이렇게 악을 집단화하였고,
전두환이라는 인간이 마찬가지로 악을 집단화하였으며
우리는 지금도 이들과 똑같은 것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세속 집단에서만이 아니라 종교 단체에서도.
사랑을 배우는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기를 버리지 않고 이웃을 죽여버리고,
자기 소유를 나누지 않고 이웃의 소유를 공모하여 빼앗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이 버린 돌을
하느님께서는 귀한 돌로 쓰신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버린 돌을 귀하게 쓰실 뿐 아니라
귀한 돌을 버린 악한 자들을 주인이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복음은 얘기하는데 이것이 창세기와 복음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징벌이 노아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처럼
하느님께서 직접 손을 뻗어 징벌하시는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사람들의 손을 빌리시고 힘을 합치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악의 집단화도 하지만
공동선을 이루려고 합력선하기도 하고,
뜻을 모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도 하지요.
앞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한 돌들을 버리는 악한 개인과 집단을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 신앙이고,
하느님 뜻에 맞는 공동체를 이루려고 힘을 합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이겠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귀한 돌을 버리는 악한 짓을 하면서
자기는 하느님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애쓴다고
복음의 바리사이나 원로들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저 자신도 돌아보고 세상 걱정도 하는 오늘 저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