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 말씀은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사람들과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사람들과 그 사건을 두고 하신 말씀인데
오늘 주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그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두.
이 말씀에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다 그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왜 다 죽지 않고 몇 명만 죽는 것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실상 회개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죄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죄인이고 다 죽어야 하고 그래서 다 회개해야 하는데
죄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며 그가 진짜 죄인이고 더 죄인이지요.
사실 죄인이라고 그래서 자기는 회개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회개하려고 노력할 것이고 회개로 상당히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이 나아갔어도 자기는 아직 죄인이라고 할 터인데
성인들은 다 이렇고 사실 성인들에겐 회개하라는 촉구나 경고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려고 하지 않는 죄인들에게나 촉구와 경고가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주님을 보내셨다고 오늘 전례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모세와 주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시어
말로써 회개를 촉구하고 경고하신 것은 사랑의 표시이니 문제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끔찍스럽게 생각하는 그 사건들도
하느님 경고라고 오늘 전례가 얘기하는 점입니다.
말로는 안 되니 끔찍한 일을 통해 하느님께서 경고하시는 거라고 얘기하잖습니까?
오늘 바오로 사도는 두 번째 독서에서 모세의 인도를 받아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사람 중에 주님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들이
광야에서 살해되어 널브러진 일들을 얘기하며 이렇게 그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어쨌거나 이런 경고를 받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러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살이나 타살 곧 인간에 의한 죽음이 아닌 한
그 죽음을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경고 곧 하느님의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죽음을 하느님의 경고로 받아들이고 회개까지 하면 신앙인이고,
그것을 보고도 아무런 경고를 받지도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이 비신앙인이겠지요.
그리고 더 나아가 자비도 경고도 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일만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일도 하느님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그 어떤 것에서도 하느님의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베어버리시려는
하느님께 열매를 맺도록 당신이 노력할 테니 말미를 주십사고 청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온 정성을 쏟으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회개의 열매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세상 종말에 다다른 사람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자기 죽음이 가까이 오는데도 하느님 앞에 서려고 하지 않고,
여전히 사람들 앞에 서 있거나 죽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이제라도 하느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제가 나이를 먹으면서 새삼 마음에 와닿는 기도가 성모송이고,
“천주의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빌어주소서.” 부분입니다.
그리고 오늘 바오로 사도가 하신 말씀도 마음에 새깁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육신은 무너져도 영적으로는 넘어지지 않고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