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명기는 큰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오늘 주님께선 큰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 말씀에 비춰볼 때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크신 하느님을 모신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인데
이는 하늘을 품은 호수가 가장 큰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고 가르치는 이가 위대하다고 합니다.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어떤 사람을 칭찬하곤 합니다.
그런데 오늘 신명기는 모세의 법을 지닌 민족이 위대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까?
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지키며 사는 사람이 더 훌륭합니까?
제 생각에 아무리 주님이 하느님 계명을 지니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해도
법 없이도 법이 가르치는 것 이상으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법을 가지고 법에 따라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라고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을 함부로 어기고 무시하는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율법 학자가 하는 말은 지키되 그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는
주님의 가르침과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일 겁니다.
사실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율법주의가 문제이고,
율법주의자의 문제는 율법 준수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율법을 지키건 어기건 그것은 자기중심이고,
사랑이 있으면 율법을 지키건 어기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율법을 어길 때는 언제나
사랑을 위해서이고 사람을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만일 율법에 사람과 사랑이 없이 법만 있다면
그것을 진정한 하느님의 계명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순 시기를 지내는 요즘 제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단식재와 금육재의 준수 문제입니다.
저 혼자일 경우에는 이것들을 어길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구와 같이 식사할 경우에는 이것을 쉽게 어기곤 합니다.
사제가 더 모범이 되어야 하나?
그래서 밥을 먹으러 가도 채식 식당을 골라서 가야 하나?
식사를 하면서 술은 먹지 않고 먹지 말자고도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다 그가 또는 그들이 선택하는 곳에 가지만
실은 비겁하게 선택의 고민을 그들에게 미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이 먹기 싫었는데 그 때문에 먹은 것이 아니라
먹고 싶었는데 그에게 술 먹은 책임을 돌리고 제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이나 하는 저는 작은 사람인 것이 틀림없고,
욕망을 숨기면서 남에게 책임을 돌리고 자기합리화나 하는 저는
작다 못해 찌질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담은 호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담은 큰 사람이 되라고 도전을 받는 오늘 저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