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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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요한 5,3)
세례의 치유에 대한 예시
이것은 어떤 종류의 치유입니까? 이 일은 어떤 신비를 나타냅니까? … 이 이야기의 큰 틀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입니끼? 훨씬 큰 힘을 지닌 세례가 주어지려는 참입니다. 모든 죄를 씻어 주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세례는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 못가의 광경은 이러한 것들을 예시합니다. … 예수님께서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은 물이 육체의 병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랫동안 듣고 배워 온 못가의 사람들이 물은 영혼의 병 또한 치유할 수 있음을 쉽게 믿도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사랑은 하느님이 아닌 것이나 신적이지 않은 것을 조금도 참지 않습니다. 이 올가미에 걸려든 사람, 이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업적을 세우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언가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의 하는 일이 아무리 하찮다고 해도, 그것은 그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크나큰 유익이 됩니다. 하느님은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사랑 없이 행하는 자들의 고행보다도 그런 사람의 행적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런 사람의 한가로운 삶이 다른 사람의 업적보다 훨씬 이롭습니다. 그러니 이 낚시바늘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행복하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여러분은 더욱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사랑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가 사랑에 사로잡히고 자유로워지기를! 아멘.(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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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요한 1서 전체
<생태 회심 주간> 생태적 묵상


2. 교황 프란치스코의 찬미받으소서 10-12항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
10. 저는 매력적이고 감탄을 자아내는 한 인물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이 회칙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로마 주교로 선출되면서 저는 그분의 이름을 저의 길잡이요 영감으로 삼았습니다. 저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취약한 이들을 돌보고 통합 생태론을 기쁘고 참되게 실천한 가장 훌륭한 모범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생태 분야에서 연구하고 활동하는 모든 이의 수호성인으로 비그리스도인들의 사랑도 많이 받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피조물과 가난한 이들과 버림받은 이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을 하셨고, 또한 그 기쁨, 관대한 헌신, 열린 마음으로 큰 사량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사셨던 신비주의자이시며 순례자이셨습니다. 그분은 자연 보호,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 사회적 헌신. 내적 평화가 어떠한 불가분의 유대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11.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통합 생태론이 수학과 생물학의 언어를 초월하는 범주에 대한 개방성을 요청하고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와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해와 달 또는 가장 작은 동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모든 피조물을 찬미하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성인께서는 모든 피조물과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꽃 앞에서 설교하시며 꽃이 마치 이성을 지닌 듯 주님을 찬미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한 그분의 반응은 지적 평가나 경제적 계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에게 모든 피조물은 사랑의 유대로 자신과 결합된 누이였습니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돌보아야 한다는 소명을 느끼신 것입니다. 그의 제자인 보나벤투라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사물의 공통 원천에 관한 성찰로 더욱 커다란 측은지심에 찬 성인께서는 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이라도 ‘형제’나 ‘누이’로 부르셨습니다.”
그러한 확신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 선택에 영향을 주기에 순진한 낭만주의로 폄훼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자연과 환경에 접근하면서 이러한 경탄과 경이에 열려 있지 못하고, 세상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우애와 아름다움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각적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지배자, 소비자, 무자비한 착취자의 태도를 취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밀한 일치를 느낀다면 냉철함과 배려가 곧바로 샘솟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청빈과 검소는 피상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곧 현실을 단순히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12. 더 나아가 성경에 충실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우리가 자연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당신의 무한한 아름다움과 선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놀라운 책으로 성경을 받아들이도록 권유하십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습니다”(지혜 13,5).
확실히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로마 1,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수도원 정원의 일부를 언제나 손대지 않은 상태로 놓아두어 거기에 들꽃과 목초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러한 아름다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해결해야 할 문제 이상의 것으로, 감사와 찬미로 관상해야 하는 기쁜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