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벨탑(1563)
작가 : 피테르 브리헬(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
크기 : 목판 유채 114 cm × 155 cm
소재지 : 비엔나 미술관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성서는 인간들에게 위기를 벗어나거나 새로운 삶의 출구를 찾을 수 있는 교훈을 주기 위해 여러 가지 예를 많이 들고 있는데,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의 사화는 인간이 빠지기 쉬운 오만과 교만의 위험성을 제시하기 위한 좋은 내용이며 어느 시대에도 필요한 것이기에 그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재해석 되고 있었다.
성서는 바벨탑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온 세상이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낱말들을 쓰고 있었다.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주해 오다가 신아르 지방에서 한 벌판을 만나 거기에 자리 잡고 살았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 단단히 구워 내자.” 그리하여 그들은 돌 대신 벽돌을 쓰고, 진흙 대신 역청을 쓰게 되었다.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
그러자 주님께서 내려오시어 사람들이 세운 성읍과 탑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보라, 저들은 한 겨레이고 모두 같은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하려는 일의 시작일 뿐, 이제 그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말을 뒤섞어 놓아, 서로 남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 주님께서는 그들을 거기에서 온 땅으로 흩어 버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성읍을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 설화의 배경은 이스라엘 인들이 노예로 끌려갔을 때 보았던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신전 지구라트를 보며 느낀 감회를 자기들의 이야기로 각색한 것이다. 이것은 이 사건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인들의 삶에서 체험한 것을 자기들의 인생에 교훈적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돌렸다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다.
작가 역시 성서의 이 내용을 바로 당시 자신이 살던 도시인 오늘날 벨기에의 안트와프의 현실을 바탕으로 바로 바벨탑의 이야기를 전개했다. 즉, 자기 현실에 걸맞는 성서적 교훈에 대한 전개로 볼 수 있다.
세상이 주는 부와 편리에 도취되어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는 도시인들의 삶 안에서 그는 성서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관람자에게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풍요와 편리의 삶 안에 들어있는 인생을 파멸로 인도하는 함정과 함께 진정한 삶의 가치를 바로 하느님 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신앙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작가는 16세기 오늘날 네델란드에 속하는 플랑드르 지방을 대표하는 북유럽 최고의 화가이자 농민화가였으나,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출신이 농민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몸담았던 농민들의 생활을 바탕으로 인간미 물씬 풍기는 인간 삶의 묘사로 관객들을 농민의 삶이란 척박한 것에서 훈훈한 인간미로 초대하고 있다.
작가 당시 네델란드는 남쪽은 가톨릭, 북쪽은 개신교로 갈라져 있었는데,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의 필립피 2세 왕이 개신교 신자들을 박해하자 많은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작가 역시 개신교 신자로서 스페인의 폭정과 그 배경인 가톨릭 교회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농민들이 지닌 낙천적이고 인간미 넘치는 마음으로 이 미묘한 상황에서도 광신적인 종교성은 띠지 않으면서 자기의 주장을 정확하고 대범히 표현했는데 오늘 이 땅에 개신교 일부 세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광기로 크리스챤의 모습에 엄청난 실망을 보이고 있는 현실에서 기품있는 개신교 신자로서의 불편심 표현의 좋은 모델을 보이고 있다.
작가는 바벨탑 사건이라는 하느님의 뜻과 거리가 먼 인간들의 기행이 세상 별도의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의 바탕에서 힘을 받아 시작되는 것임을 알리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제인 바벨탑은 세상과 동떨어진 어떤 장소가 아닌 자기가 살던 도시의 중심과 주택가 그리고 외부와의 좋은 배경이 되었던 항구, 즉 자기들의 삶의 중심에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다.
당시 안트와프시는 국제 무역업으로 대단한 부를 축적하고 풍요로운 세계에서 몰려든 외국인들간의 문화 및 언어 소통 문제와 세금 문제들로 사회적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던 혼란의 공간이었다. 한마디로 풍요를 이룬 상황에서도 주민들 사이에 많은 이질적인 요소로 단절과 갈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작가는 이같은 상황의 해결점을 제시하기 위해 창세기 바벨탑의 설화에서 접근하고자 바다를 끼고 풍요와 흥청거림을 보이는 시가의 중심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바벨탑을 두었다.
작가는 자기가 속한 세상의 도시 안에 바로 창세기가 제시하고 있는 바벨탑의 혼란이 들어있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서 바벨 탑의 교훈을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공간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로 돌렸다.
아름답게 채색된 중세 도시의 집이지만 자세히 보면 참으로 인간이 살기 위한 환경으로는 너무 삭막하고 고독한 섬과 같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사람을 찾아보면 왼편에 있는데, 그것도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과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 두 세명이 전부다. 겉으로는 대단히 화려하지만 생기와 인간미가 사라진 도시의 상징인 셈인데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과도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다.
인간들을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 삶의 허상과 부재 체험을 알려주는 공간임을 알리면서 하느님을 떠난 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의 실상은 바로 허상임을 알리고 있다.
그 옆으로는 이제 막 바벨탑에 올라가는 두 사람들이 보이고 계단 옆에는 지하로 땅을 파 길다란 자제를 보관한 장소가 보인다. 이런 구성을 보면 화가가 이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작가가 잠시 로마에 머물 때 그를 경탄하게 만든 콜로세오와 같은 대형 건축물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볼 수 있다.
그림 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가 보인다. 넓은 자연을 등장시키는 화가의 대표적 화풍이다. 작가는 농촌에서 살았던 사람답게 자연의 위대함과 정겨움을 조화시키는 탁월한 심미안이 있었기에 이렇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도시를 등장시키고 있다.
당시 네델란드 개신교 신자들에게 큰 부담을 주던 스페인 왕 필립피 2세 왕을 등장시킨다. 이것은 바빌론의 설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보이나 개신교 신자인 작가의 처지에서는 그들의 삶을 억압하는 악마의 세력의 상징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중앙에 중심 인물로 묘사된 왕을 보면 왕관과 고귀한 신분의 가운을 걸치고 있고 오른손에 황금봉을 쥐고 있다. 왼쪽에 있는 측근 보좌관 인듯한 사람이 두 손을 사용해 공사 진척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그 뒤로는 붉은 색 옷을 입은 병사들이 창과 칼로서 호위하고 있다. 이 그림 전체에서 유일하게 나타나는 창과 칼이다. 왕이 가진 강한 힘의 권력을 나타내며 무력을 행할 수 있는 군사력의 표현이다.
작가는 재치있게 이 인물들 을 바벨탑과 연관시켜 창세기에 등장하는 나쁜 왕으로 회자되는 니므롯으로 묘사했다. 니므롯이란 인물은 바벨탑이 세워지던 당시의 인물로서 함의 아들 니므롯(Nicrot)이다. 바벨탑은 창세기 11장인데 니므롯이 등장하는 구절은 창세기 10장의 족보 속에 등장한다. 족보를 올라가면 노아의 세 아들 중에서 아버지를 욕보여 저주를 받은 것으로 기록된 함의 아들 계열에 속한 핏줄이다.
작가는 이처럼 바벨탑이라는 성서의 설화를 통해 성서의 다른 부분까지 인용하면서 자신이 처한 어두운 현실을 성서의 다른 부분에 등장하는 못된 왕과 비김으로서 사건을 임의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현실의 밝음과 어둠은 성서의 사건과 연결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즉, 우리 인생과 현실의 많은 문제는 성서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왜 작가는 이 거대한 탑을 도시 중앙에 두었을까에 대해 우선은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기 위함이다. 도시의 여러 부분을 광범위하게 그리고 있으나 문제의 핵심을 찾을 곳은 바로 이 탑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당시 네델란드를 식민지로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에 대한 항거의 상징이라고 본다.마지막으로는 바벨탑의 성경적 상징인 인류의 원죄로 인한 여러 문제는 예수님의 도움이 없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현실의 모든 어려움은 복잡하고 시대적인 상황이 전혀 달라진 현실에서도 성서와 연관을 지을 때 맞아 떨어지게 마련이며 그러기에 신앙은 오늘을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 우리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알리고 있다.
작가는 5백여 년 전 자신들이 이룩한 부와 번영에 도취되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바벨탑이란 성서의 내용을 자기 시대로 끌어내려 설명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 시대에 비길 수 없을 만한 심각한 위기가 있다. 인공지능과 여러 가지 과학적 발명으로 인간은 하느님 없이도 살수 있다는 오히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시대착오적인 망상이란 엉뚱한 생각에 빠진 시대에 살고 있다.
작가는 시편 저자의 다음 말씀처럼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인간사에서 하느님께 해답을 찾을 때 모든 것이 가능함을 알리고 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시편 127,1)
오늘 우리나라는 잘못된 지도자의 처신으로 국민 전체가 고통을 받은 대단한 시련 중에 있다.또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발언을 어떤 종교 단체와 성직자들이 앞장서고 있으며 이들의 사악한 주장 역시 많은 동조자들을 모으며 국가 위기의 큰 악재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우리의 현실에서 작가가 바벨탑의 사화에서 자기 민족이 처했던 시련, 자기들이 구축한 풍요가 주는 위험을 고발하며 경각심을 준 것처럼 오늘 우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