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성전에서 흘러 나오는 물이 생명을 살리는 것에 대해서 봤는데
연장선상에서 오늘 얘기도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는 이 사랑을 어미의 사랑에 비유합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복음은 살리는 일을 성부처럼 성자께서도 계속하고 계심을 얘기합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이렇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저의 사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분의 문제로 제가 오랫동안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제가 아는 것만 해도 세 차례나 수도원을 들락날락한 분으로서
다시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을 도와달라고 계속 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가능성도 없고 포기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그분이 계속 조르니 저로서도 난감하기만 합니다.
그분은 한마디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분입니다.
물론 알면서도 배은망덕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부르시고 계속 인도하시는 하느님께 계속 배은망덕했고,
도움을 주도록 그때그때 보내 주신 분들에게 배은망덕했습니다.
수도자가 되기에 근기도 부족하고 되려는 동기도 불순하지만
하도 되고 싶어 하니 살면서 변화되기를 바라며 기회를 줬는데
번번이 상황 탓이나 상대방 탓을 하며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딜 추천해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 거의 뻔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계속 도와야 하는지 오늘 말씀 때문에 고민이고,
도와주지 않는 것은 사랑의 포기가 아닌지 고민이 되는 겁니다.
물론 머리로는 분명합니다.
이런 배은망덕한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입회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충고해줘도 바꾸려고 하지 않고 또 다른 은인이 나타나길 바라는
그를 더 이상 충고하기를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기 때문에 고민인 것인데
오늘 말씀 때문에 저는 충고의 포기를 포기합니다.
그런데 충고의 포기를 포기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닙니다.
충고의 포기가 그에게 불행이기 때문이 아니라
제게 불행이기 때문에 포기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충고의 포기는 저의 사랑 포기이고
저의 사랑 포기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제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일 뿐입니다.
어제 얘기와 연결하면 성전의 샘이 말라버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전에서 물이 계속 나와 흘러가야 하는데 샘이 말라버린 겁니다.
제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의 물이 그에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샘이 말라버려 사랑의 물이 제게서 나오지 않는 거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야단치는 것이든 설득하는 것이든 벌을 주는 것이든
샘이 말라버린 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랑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살리는 일을 주님께서 내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래서
사랑의 샘이 내 안에서 말라버리지 않는다면
저는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포기를 포기하고,
사랑의 물이 우리 안에서 계속 흐르게 해야겠습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