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
2025년 4월 6일 사순 제5주일 강론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을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는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간음과 정결에 대해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십계명에 의거하여 간음을 절대적으로 단죄합니다. 구약시대부터 아내에게는 절대적인 정결이 요구되어 왔는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으로부터 기대하시는 충실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은 계약에 대한 불충실을 정신적 간음이라고 비난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표상을 사용하시어 그 당시 사람들의 결핍된 신앙을 꾸짖셨으며, 표징을 요구하는 불신앙자들과 당신과 당신의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불충실한 자들을 “악하고 간음하는 세대”(마태 12,39; 마르 8,38)라고 부르십니다. 야고보 역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세속에 대한 사랑을 타협시키는 것을 간음으로 간주합니다.(야고 4,4). 바오로는 사람을 하느님 나라에서 제외시키는 이 죄를 피하기 위하여 사랑 안에서 정결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베니스의 통령(統領) 도겔(Dogel)은 취임 의전을 거행할 때 아드라해 바닷물에 반지를 하나 던져 넣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해상공화국 베니스, 곧 바다와 혼인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바다 속에 있는 ‘게’들까지 전부 끌어 안고 바다의 모든 것과 결혼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부부와의 혼인성소 그리고 독신으로 사는 사제나 수도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의 혼인은 배우자뿐만 아니라 그 식구, 친적들 그리고 공동체의 미운면과 부족함 모든 것들을 끌어안고 혼인하는 것입니다. 부부에게는 서로간의 사랑 하나만이 정결 생활의 결정적 이유이듯 사제나 수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 하나만이 유일한 기준입니다.
이처럼 정결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인간 본질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고 인간을 변화시켜 가장 신비롭게 그리스도를 닮게 만들어 줍니다. 정결의 진정한 가치는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려는 즉 사랑하려는 원의에서 시작되고 살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과 원의는 순수하고 단순한 순결을 지니게 해 줍니다.
이러한 정결의 사랑이 뒷받침 되지 않을 때 부부성소이든 사제, 수도성소이든 순결한 마음을 잃어 지나친 잘못된 우정을 맺을 수 있습다. 가령 분별없는 지나친 만남, 쓸데없는 메시지 왕래, 불명료한 대화, 개인적이고 그리고 정기적인 값비싼 선물교환으로 표현되는 친밀하고 감상적인 애정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앙적인 것으로 위장된 쾌락과 로맨틱한 사랑이 되어 폐쇄적이고 불행한 간음적 우정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정결의 사랑이 뒷받침 될 때 분별력 있는 신중한 우정으로 충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평가된 우정, 시련을 거친 우정으로 선한 의지를 갖추어서 기쁠때에도 어려울때에도 여전히 충실하게 남아 있는 우정이 됩니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보편적이고 진실은 우정이 되게 됩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쾌락적이고 파멸을 초래하는 우정이 아니라 순수하고 정결한 사랑을 지니고 자유롭고 보편적인 하느님 사랑을 지닌 순결한 우정으로 거듭나도록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이 때부터 4 학년 A반은 작은 지옥이 되었다. 안젤라는 항상 숙제를 빈틈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선생은 그녀에게 매우 못되게 굴었으며 모든 방법을 다해 그녀를 모멸했다. 이 아이는 고통을 잘 견디어 냈지만 몸은 현저하게 약해졌다---“보아라, 안젤라야 이것이 그래도 어렵지 않니?"--“아니에요 신부님,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경멸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았을 때 큰 고통을 당하셨잖아요.”
이 아이의 믿음은 나를 경탄케 했다. 안젤라 자신은 내게 와서 그녀가 당한 잘못된 처사에 대해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이 종종 울면서 나에게 여선생의 못된 공격에 대해서 설명하곤 했었다. 강의시간에 여선생은 안젤라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안젤라의 믿음을 없애기 위해 매일 새로운 것을 고안해냈다. 강의계획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녀는 자기의 학생들 앞에서 무신론자의 모든 공격수단을 펼쳐보였으며, 안젤라는 이에 맞설 수가 없었다. 안젤라는 아무 말없이 일어서서 고개를 숙인 채 오열을 참았다. 그녀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어떻게 이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인가?
성령강림절이 가까이 왔을 때 쯤에는 강의가 점점 더 여선생과 이 열살박이 꼬마 간의 대결로 되어버렸다. 언뜻 보기에는 여선생이 이겼고 안젤라는 항상 침묵으로 일관했다. 안젤라는 왜 이리도 무작정 견디고만 있을까? 여선생을 참지 못하게 한 것은 바로 안젤라의 침묵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은 당황하여 나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내가 개입한다면 분위기만 더 험악해질 것이다. 감사하게도 안젤라는 잘 견디고 있었다.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일은 그 작은 마을과 전체 이웃마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안젤라를 매일 영성체 하도록 허락했다고 해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여선생이 이 연약한 아이에게서 보편적인 선과 믿음의 소중함을 발견하였으리라는 것은 어느 누구나 알고 있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딸들에게 계속 참고 견디라고 격려했으며, 안젤라는 갑작스럽게 일반적 관심사의 초점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녀의 위대함을 경탄했다. 그녀 자신만이 이를 몰랐으며 여선생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그녀의 믿음을 논증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