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기둥 위에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 살게 될 것이라고 한
구리 뱀은 십자가 위에 달리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의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구리 뱀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았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의 고상을 우러러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종교 가운데 이 십자고상(十字苦像)과 같은 상을
우러러보는 종교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불교만 봐도 부처님상은 십자고상처럼 처참하지 않고,
인자하고 관상적이고 평안하고 심지어 미소를 띠고 있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을 평안하게 하고 자꾸만 보고 싶게 합니다.
그리고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개신교도 십자가만 달아놓지
우리 천주교처럼 십자고상을 달아놓지 않고 우러러보는 것은 더더욱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때 이 십자고상을 쳐다보지 않습니다.
왜?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통 때는 십자고상은 보기만 해도 불편하고,
특히 희희낙락하고 싶을 때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때 보고 싶고 보게 됩니까?
어떤 때 십자고상을 우러러보게 됩니까?
내게 큰 고통이 있을 때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내게 큰 고통이 있을 때 십자고상을 보노라면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시고 고통을 받으신 주님이
위로와 위안이 되고 더 나아가 구원이 됩니다.
사실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주님께서 희희낙락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아마 우리는 그런 주님을 보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고상은 우리에게 평안이 아니라 위로와 위안이고,
위로와 위안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구원이 되지 못하는 사람은 십자고상을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고,
구원이 못 되면 위로와 위안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우러러보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러러보는 사람,
쳐다보기라도 하는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
이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