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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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요한 8,31)
사람들의 믿음을 시험하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처한 조건은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인내는 가르침이 깊이 뿌리내렸을 때 가장 잘 샘솟습니다. 땅에 깊이 뿌리 박은 참나무를 뿌리 뽑아 버릴 수 있는 바람은 없듯이,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못 박힌 -뿌리내린 데서 더 나아가 못까지 박혀 있다면- 영혼은 파멸할 수 없습니다 ... 우리 주님께서는 믿는 이들의 신앙을 시험하고 싶어 하십니다. 신앙의 겉모습만 지니고 있지 않은지 알아보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더 충격적인 말로 그들의 영혼 깊이 파 들어가십니다 ...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말씀으로 그들의 미음 안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믿지만 머무르지 못할 이들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굉장한 약속을하십니다. 그들이 실로 당신의 제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한때는 믿었지만머무를 수 없어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암묵적인 꾸짖음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본 설교에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영향이 짙게 드러난다. 위-디오니시우스는 익명의 인물이다. 실로, 본 설교는 엑카르트의 설교 중에서 디오니시우스의 냄새를 가장 짙게 풍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본 설교에는 디오니시우스와는 다른 차이도 들어 있다. 엑카르트가 본 설교의 말미에 이르기까지 피조물로 되돌아가는 것을 장황하게 강조하는 반면, 위-디오니시우스는 피조물로 되돌아가는 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위-디오니시우스는 만물이 하느님 안에 있다고 하는 만유내재신론을 엑카르트만큼 강조하지는 않는다.
엑카르트는 부정의 길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첫째 오솔길에서 살펴보았듯이, 액카르트의 영성은 창조-중심의 영성이지 고행의 영성이 아니다. 그는 본 설교에서 피조물로 되돌아간다. 먼저 그는 부정의 길 여정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시금석을 제시한다. 그 시금석은 무엇인가? 이 탄생이 질제로 일어나면, 어떠한 피조물불도 여러분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모든 피조물이 여러분을 자극하여 하느님과 이 탄생을 향해 몰--돌아서게 할 것이다. 하느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의 잠재력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게로 되돌아가 그들을 새로운 빛에서 보게 된다. 이러한 경험에서는 오감을 억누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풍부한 감수성과 접촉함으로써 오감을 민감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부정의 길에서 벗어나, 피조물을 이전보다 더 예민하고 더 황홀하게 마주하게 된다.(367)


<금주간 성서읽기> 사도 2장-6장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4기 : 1300 ∼ 1500년
서구 통일 붕괴 시대의 교회
제 2절: 콘스탄츠 공의회와 공의회 우위설
콘스탄츠, 일치 공의회:
그것은 둘 다 가치가 있다는 양면성이 이 공의회에서 그 해석에 관하여 논쟁이 된 원인이었다. 세 명의 교황들은 동시대인들의 인내력을 너무 시험하였고, 이제 요한 23세는 방해 책동을 통하여 가장 많이 그러하였다. 많은 공의회 참석자들이 급진적인 이념으로 향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는 실제로 근소하였다. 대다수는 그 교령을 보수적인 뜻에서 이해되기를 원하였고, 문제된 조치는 하등의 신앙적 결정이 아니고 이교의 반복되는 비슷한 사례에 대한 교회의 필요한 보호책으로 보았다. 그들은 마르실리우스의 의미처럼 교황직에 대한 공의회의 근본적인 우위성에 대한 신조 정의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교령은 급진적인 “공의회 우위적”으로가 아니라 온건적인 “공의회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고, 그러므로 신조 결정은 아니다.
교황의 도주에 이어진 몇 주 동안은 무서운 흥분과 격렬한 토론이 있었다. 앞으로 요한에 대하여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요한은 라인 강을 건너 부르고뉴 지방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공의회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그문트는 그를 체포하게 하였다. 그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1415년 5월 29일에 폐위되었다. 로마계 교황
그레고리오 12세는 1415년 7월 4일에 자발적으로 퇴위를 발표하였다. 유일의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확고하게 고집하고 있던 90세의 이 교황은 추후에 자신의 이름으로 공의회를 다시 한번 소집할 권리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아무도 이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았을지라도 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것이 그에게 허락되었다. 완고한 베네딕토 13세와 결말을 짓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지그문트는 페르피냥에서 직접 그와 담판하였으나 하등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대부분 스페인 사람인 베네딕토 13세의 지지자들이 지지를 철회하고 관계를 끊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도 이제 공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스페인 국민”으로서 다섯번째의 대표가 되었다. 베네딕토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고, 이 재판은 1417년 7월 28일 그의 폐위로 끝났다.(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