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면서
주님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는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그에 대한 답입니다.
“나 이제 떠나가 살던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한 민족으로 만들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셨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시려다 돌아가신 겁니다.
이것은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이미 말씀하신 바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처럼 친목 모임도 있고,
학술 모임처럼 연구 모임도 있으며,
등산 모임처럼 동호회 모임도 있고,
상인 모임처럼 공동의 이익을 위한 모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모임을 결성하려고 했다면 죽임당하진 않았을 겁니다.
주님은 하느님 중심으로 사람들을 모으려 했기에 죽임당하신 것이고,
사람들을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고 하셨기에 죽임당하신 겁니다.
헤로데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한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헤로데는 사람들이 자기 백성이어야 하고 자기가 그들의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주님이 그들의 임금이 되고 사람들이 주님 백성이 될 것 같으니 반대한 겁니다.
두 번째로 주님이 이스라엘 민족만 구하려 하셨다면 죽임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복음을 보면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주 싫어하는 말씀,
곧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이스라엘 과부가 아니라 사렙타 과부에게 파견하셨고,
엘리사가 이스라엘 나병 환자는 놔두고 나아만만 고쳐주셨다는 말씀을 하시자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지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시는 분이고,
흩어진 백성과 민족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오신 분이라고 우리에게 얘기하는데
선민의식이 강한 이스라엘 족속은 하느님이 이런 하느님이신 것이 싫었던 거지요.
자기들만 하느님 백성이고, 하느님은 자기들만의 하느님이시라고 믿는 것인데
지금도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일부 개신교들은 자기들 교회에 나와야지만
구원받는 선민 십사만사천 명 가운데 든다고 얘기합니다.
부모를 독점하려는 우리가 하느님마저 독점하려고 하지 않는지,
독점의식과 선민의식이 우리 신앙 안에도 박혀 있지 않은지,
하느님이 북한과 일본도 구원하시는 것이 싫지 않은지,
싫지는 않지만 내가 그들에게 가는 것은 싫지 않은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