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수난기는
공관복음과 많은 차이점을 드러냅니다.
그 차이점은 수난기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공관복음에서 유다는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으로 옵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유다는
자신이 직접 누가 예수님인지 알려주고
이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유다의 모습은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유다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먼저 나오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단지 사람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나서시는 모습은
죽음에서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주도권을 갖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요한복음은
겟세마니의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죽음의 상황에서도 주도적으로 움직이십니다.
하느님이시기에 두려움이 없으신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둔 예수님의 산란한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기에
그 가치를 선택하다보니
죽음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가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면서도 제자들 걱정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가게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고통을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갈증의 상황에서 그 갈증을 더 심하게 만드는 식초를
받아 드십니다.
당신의 죽음이
당신의 고통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표현임을 아시기에
마지막까지 그 고통을 피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한 사람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한 사람의 사랑 고백을 듣습니다.
그 고백은 우리 각자를 향한 고백이며
그렇게 우리 각자는 하느님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