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부활 대축일이니 크게 기뻐해야 함이 마땅한데
솔직히 저는 그리 기쁘지 않고 아주 무덤덤합니다.
부끄럽게도 사순시기가 부담스러운 점이 있었는데
사순시기가 끝나서 기쁜 정도이고 더 문제인 것은
그러면서도 그리 죄의식이나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것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요.
주님께서 제 안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야 기쁜데
주님께서 제 안에 살아계시니 다시 말해서 죽어 계시지 않으니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기쁨이 제게 있을 리 없지요.
또 주님께서 제 안에서 죽어 계심으로 저도 죽음의 상태에 있다가
주님이 다시 살아나심으로 저도 다시 살아나야 기쁜데
그렇지 않으니 기쁨이 없는 것이 당연하지요.
게다가 저의 공동체 생활도 참으로 만족스럽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세대 차이가 있음에도
그런 세대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주님 사랑이 저희 안에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관구장님이 법적 방문을 오셔서 저의 영적인 상태를 물으셨을 때
나중에 더 늙고 건강이 나빠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현재 저는 주님이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주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느끼며 살기에
아주 기쁘고 즐겁게 살고 있고 공동체도 서로 잘 지내고 있기에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우리 공동체만 이래도 되나 미안하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번 사순절과 부활절에 크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이
제가 저의 행복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저의 부활 강론은 시대 상황 안에서 부활의 의미를 담는 내용이었고,
올해처럼 산불이 크게 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산불 현장에 갔을 것입니다.
이유들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저는 저의 평화와 행복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지 않고,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나와 내 공동체의 행복과 평안함에 안주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자로의 비유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름 없는 부자의 불행이고,
교황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기쁨에서 지적하신 현대인의 불행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이름 없는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오히려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라자로는 오늘날의 노숙인처럼 이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과 불행에 담을 쌓고 담장 안에서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하다가
천국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내적 생활이 담장 곧 자기 안에 갇히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자리가 없기에 하느님께 오는 기쁨도 없고,
이웃에 대한 열정도 사그라들어 자기 안에 불만과 분노만 있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제가 저와 저의 공동체 얘기를 길게 한 것이 이 뜻입니다.
저도 공동체도 신자유주의의 풍요를 누리고 즐기면서
부지불식간에 신자유주의에 점령당하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소비주의와 쾌락주의에 프란치스칸 정신
곧 가난, 작음, 형제애 정신이 죽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욕망을 합리화함으로써 욕망은 살고 사랑은 죽게 만듭니다.
신자유주의는 고립의 정신을 심화시킴으로써
혼밥과 혼족은 늘게 하고 형제적 삶은 시들하게 만듭니다.
욕망은 펄펄 살아있고 사랑은 죽어있습니다.
육의 정신은 살아있고 프란치스칸 정신은 죽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부활에 해야 할 것은 죽어있는 정신들을 살려야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기도와 헌신의 정신,
우리의 영성을 살려고 하는 정신을 되살려야 할 것입니다.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