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에 이어 오늘도 막달라 마리아 얘기입니다.
어제는 마태오복음이고 오늘은 요한복음인데 차이점도 있고 공통점도 있습니다.
어제 마태오복음에서는 마리아가 주님의 발을 붙잡는 것이 허락되었는데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붙잡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 차이점입니다.
요한복음의 주님께선 왜 붙잡지 말라고 하셨을까?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당신이 하늘에 오르는 것을 막지 말라는 뜻에서 붙잡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마리아가 인간적으로 의지하고 집착하기에 그러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그건 그렇고 두 복음이 똑같이 얘기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형제라고 부르는 점입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부활 전 그러니까 최후 만찬 때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부활 전에는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이 부활 후에는 왜 형제라고 부르실까요?
제 생각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사람은
이제 동급이 됨이 마땅하다고 하심이 아닐까요?
신성을 체험한 사람은 신이 된다는 뜻으로.
그래야 마땅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자신도 부활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신화(神化)해야 마땅합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부활 체험하고도 여전히 인간성에 머문다면
그런 사람은 진정 부활 체험을 한 것이 아니거나
불완전한 체험 또는 얼치기 체험을 한 것일 겁니다.
부활 체험하고도 주님의 형제가 아니라 죄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부활 체험하고도 여전히 세상일의 종사자로서 살아서는 안 되고,
부활 체험하고도 여전히 세상일에 집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사람은 모두 주님의 형제로서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 순례자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선종하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위중한 중에도 부활 미사에 모습을 나타내 부활절 메시지를 내셨습니다.
교황께선 부활 대축일 미사로 마지막으로 당신을 봉헌하고 싶으셨던 것 같았고
남아있는 힘을 모두 끌어모아 메시지를 내신 것 같이 제게는 느껴졌습니다.
이 교황께서 올해 희년의 기도를 우리에게 남기셨는데
여기서 주님을 우리의 형제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성실한 일꾼과 희망의 순례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을 추모하며 그리고 희망의 순례자가 되기로 결심하며 이 기도를 바칩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우리 형제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믿음과
성령을 통하여 저희 마음에 부어 주신 불타는 사랑으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리라는 복된 희망을 저희에게 다시 일깨워 주소서.
악의 세력이 패배하고 아버지의 영광이 영원히 드러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확신에 차 기다리며 온 인류와 우주가 떨쳐 일어나도록 아버지의 은총으로
아버지의 은총으로 저희가 복음의 씨를 뿌리는 성실한 일꾼이 되게 하소서.
희년의 은총이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 안에서 천상 보화를 향한 갈망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우리 구원자신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온 세상에 흘러넘치게 하소서”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