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오늘 제자들은 기쁨과 두려움 두 가지 감정 상태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감정이 격하게 출렁이고 널뛰기를 합니다.
지옥에 갔다가 천당까지 간다고나 할까요?
이것을 오늘 복음은 ‘너무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또는 ‘너무 기쁜 나머지’라고 합니다.
이렇게 감정이 극단적으로 널뛰기하면 일반적으로는 병적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조울증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이렇습니다.
“정신 질환의 하나로 감정 변화의 기복이 심하여 상쾌하고 흥분된 상태와
우울하고 억눌린 상태가 번갈아 가며 또는 한쪽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증세”
어쨌거나 너무 두렵거나 너무 기쁘거나 하면
일반적으로 정상적이지 않거나 불안정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의 감정 기복은 인간적으로는 비정상이지만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흔히 보이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체험할 때 공통으로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과 기쁨이고,
그 감정이 실로 어마어마하고 압도적이라고 신비가들은 말합니다.
이런 압도적인 두려움 때문에 어떤 때는 유령이라고 느끼게도 되는데
오늘 복음에서도 그랬지만 풍랑과 싸우는 중에 주님이 나타나실 때도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두려워하였지요.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기만 하면 유령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났을 때 두려움만 있다면 그것은 유령 또는 악령을 만난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을 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런데 두려움과 기쁨은 동시에 느낄 수도 있고,
두려움이 먼저 기쁨은 나중에 느낄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내가 만난 것이 악령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면
두 감정을 같이 느껴야 한다는 것이고,
이때의 두려움은 나쁜 두려움이 아닐뿐더러 필요한 감정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지혜의 시초라거나 하느님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나 하느님의 두려움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말 그대로 대상적인 두려움이고,
앞서 봤듯이 다른 두려움과는 다른 것으로서
이 두려움이 없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체험하지 못하기에 필요합니다.
이 말은 두려움 없이 하느님을 만난다면
하느님을 만나고도 우린 하느님으로 체험치 못하기에 그래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두려움이란 무엇이고 그것이 필요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 하느님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체험한 뒤 우리가 하느님께 동화되고 신화됐을 때
지니게 되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느끼시는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두려움을 느끼신다고요?
물론 우리의 두려움과 다르지만 하느님도 두려움을 느끼십니다.
사랑의 두려움이고 우리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수녀원을 걸어오는 길에 어린아이를 봤는데
세워져 있는 자전거가 신기한지 그리로 다가가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저 자전거가 넘어지면 큰일 나는데 하는 두려움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남의 애인데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사랑이고 하느님의 두려움입니다.
맹자도 이런 마음을 예로 들면서 성선설을 주장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튼 우리의 체험이 하느님 체험이 되려면 이런 두려움들이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기쁨이 반드시 뒤따라야 합니다.
기쁨이 없는 하느님 체험은 하느님 체험도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 체험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부디 두려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는 하느님 체험하시길!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