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 ofm
아니마또레(이태리어): '보듬어 주고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자'를 의미합니다.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하느님의 어머니로 선포한 성모님을 ‘평화의 모후’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모후’(찬미받으소서 241항)로 모시며 중동과 한반도의 평화 그리고 생태적 회심(인간영혼과 자연의 회복)을 지향하는 온라인 기도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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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7일 부활 2주일
고 도미니코 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에게 건네는 평화의 메시지와 함께 성령과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증언을 듣고도 제자들은 무서워서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닫아 걸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을 방안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로 극복됩니다. 이 평화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불신과 의혹은 평화의 인사만으로 아직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 평화를 건네는 분이 정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인지 의심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손과 죽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순간 제자들은 기쁨에 차서 불신에서 불완전한 믿음을 거쳐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게 됩니다.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부어 주십니다. 성령은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넘겨주고 또 심장에서 물을 흘려 보내실 때 온 세상에 주어졌지만,부활하신 후 주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당신의 숨을 통하여 직접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 성령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제자들과 그뒤를 잇는 교회 공동체를 거룩하게 정화시키십니다. 이 구절은 가톨릭 교회에서 고백성사의 근거가 됩니다.
기쁨과 평화,성령으로 충만한 제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한 토마는 불신과 의혹의 어둠에 갇혀 있게 됩니다. 그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메시지도 듣지 못했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지도 못하였던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은 마리아의 고백을 반복하며 “우리는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며 부활 신앙을 그에게 전해 주려 합니다. 그러나 토마는 조건이 붙은 불완전한 믿음을 드러냅니다. 토마는 부활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예수님의 시신에 집착했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의 부활한 몸을 체험하고자 합니다.
여드레 뒤에 예수님이 또다시 잠긴 문을 통과하여 토마와 다른 제지들이 함께 있는 방안에 나타나십니다. 놀랍게도 그분은 토마가 바라는 조건을 충족시켜 주십니다. 토마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주님의 옆구리에 넣어 본 순간 다음과 같은 참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 사도의 이 대답은 그의 완전한 믿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리스도에 관한 요한복음서의 가르침 전체를 요약 합니다. 로고스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나다”(에고 에이미)의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의미, 당신과 아버지가 하나라는 말씀 등을 모두 수렴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토마의 이 같은 완전한 고백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을 만나뵙지 않고 믿는 사람이 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고 더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성서 말씀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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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간 성서 읽기> 사도 15-19장
<생태 영성 주간> 고요와 침묵과 절식을 통한 단순한 삶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조롱하도록 놓아 두시지 않는다
아동 심리학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실험에 입각한 궤변이 아이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것이다 - 후에 나에게 고백한 바에 의하면 몇몇 학생들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래 정말 아기예수가 존재한다면, 왜 사람들은 그를 보지 못할까? 안젤라는 아무 말없이 아주 창백하게 거기에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쓰러질까봐 겁이 났어요.” 소녀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보고했었다. 여선생은 아이들이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자 원기를 얻었다. 마침내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헛된 망상은 버리세요.”
이 때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안젤라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교실 가운데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쳤다. “하지만 우린 아기예수님을 부르겠어요. 너희들 들었지! 우리 모두 불러보는 거야. 오세요 아기예수님!" - 순간 전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활짝 펴고 진지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그리고 마음에는 불가능한 희망을 안고 소리쳐 불렀다.
“오세요 아기예수님! "
여선생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안젤라를 쏘아보았다. 죽음이 내려앉은 것 같은 무거운 침묵. 그리고 나서 가늘고 수정처럼 맑은 안젤라의 목소리 “다시 한번!" 모든 아이들이 다시 한번 소리쳐 불렀다. 그것은 교실벽이 들썩일 정도로 큰 소리였다고 한 아이가 후에 나에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 일이 일어났다. 나는 이것을 아이들의 말 그대로 전하고 싶다. 나는 아이들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물어보았었다. 그들의 서투른 표현방법이 나에게는 우리 어른들이 할 수 있는 묘사보다 더 나은 것 같다. 그 당시 변변치 못한 사제였던 나도 기적이 매우 필요했었다. 왜냐하면 종종 사람들은 자기 힘의 한계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 아이들은 문 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들은 자기들 옆에 있는 벽과 안젤라를 쳐다보았었다. 문이 소리없이 열렸다. 아이들도 이것을 눈치겠다. 왜냐하면 환한 불빛이 갑자기 문으로 스며 들어왔기 때문이다.(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