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 드리러 오지 않았냐는 말씀에는
주님의 복잡한 심사가 담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때는 당신의 사랑에 감사할 줄 모르는 동족에 대한 분노 정도로만
예수님의 심사를 이해하려고 하였는데,
차츰 동족에 대한 서글픔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다가,
이제는 연민, 안타까움 같은 것이 더 크실 거라고 생각게 되었습니다.
만일 나의 사랑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나 분노하는 사람이나 같은 사람이겠죠.
분노한다는 것은 감사를 받고자 사랑을 한 것이기 때문이니
사랑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하는 그 사람에게나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닌 나에게나 사랑 없기는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러니 주님께서는 감사치 않는 사람에게 분노하실 분이 결코 아니시겠지만,
자기 동족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는 서글픔에 머무실 분도 아니실 것입니다.
서글픔은 사랑의 정서나 긍정적 심사가 아니고
부정적이고 슬픈 정서이고 심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외국인 혼자 돌아와 감사 찬미 드릴 때의 주님의 마음은
분노도 아니고 서글픔도 아닌 연민과 안타까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민이나 안타까움은 확실히 사랑이고,
사랑이기에 마음으로 그치지 않고 필요한 행동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기도는 기본이고, 깨우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쓸 것이며
필요하다면 하소연도 하고 꾸지람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왜 불쌍한 것입니까?
원하는 것을 얻었으면 행복할 텐데 왜 불쌍하다는 겁니까?
그것은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지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고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행복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나병의 치유가 육신의 구원에 그치고,
존재의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수없이 은총을 받습니다.
큰 병 없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은총을 받고 있고,
큰 병을 치유 받은 그런 은총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감사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그 은총을 아직까지 사랑으로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그 은총이 아직 존재의 구원으로까지 체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몸이 평안한지는 몰라도 존재가 행복하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나인지를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