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사람이 변하면 곧 죽는다지요.
이 말은 그만큼 사람이 바뀌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죽을 때에 가서야 바뀐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사람은 진정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습관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고집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신념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마음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싫던 좋던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뀌면 다른 “나”가 되는 겁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의 “나”가 싫었을 때는 다른 “나”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경우 내향적이고 너무 감성적인 내가
적당히 외향적이고 지적이고 합리적인 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큰 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나를
어렸을 때는 고치고 바꾸려고 해도 바뀌지 않았고,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지금은
새 옷보다 입던 옷이 편하다며 나를 바꾸려 들지도 않습니다.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기만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는
이제 너무 낯설어 도무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바뀜이 오늘 사울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꾼 것이 아니라 바뀐 겁니다.
자기를 바꾸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바꾸려고 한 것이고
안 바꾸면 죽이려고 하던 그였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안 바뀌려는 사울을 바오로로 바꾸시고,
사울의 적대자였던 예수를 바오로의 주님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나니아의 말처럼 하느님께서 사울을 성령 충만하도록 해주셨고
그 성령께서 눈멀었던 사울을 다시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시력을 되찾았다는 뜻도 되겠지만
예수를 구원자요 자기의 주님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고 하듯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던 사울 안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낙인을 찍어주신 것입니다.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뜻이지요.
사울이 바오로로 바뀐 뜻이기도 하고요.
저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그런 일이 닥칠까봐 두렵기도 하고,
두렵고 떨리지만 아마 기쁠 것도 같습니다.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사람이 변하면 곧 죽는다지요.
이 말은 그만큼 사람이 바뀌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고,
죽을 때에 가서야 바뀐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사람은 진정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성격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습관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고집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신념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고,
마음도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싫던 좋던 나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뀌면 다른 “나”가 되는 겁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지금의 “나”가 싫었을 때는 다른 “나”가 되고 싶었습니다.
저의 경우 내향적이고 너무 감성적인 내가
적당히 외향적이고 지적이고 합리적인 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큰 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나를
어렸을 때는 고치고 바꾸려고 해도 바뀌지 않았고,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지금은
새 옷보다 입던 옷이 편하다며 나를 바꾸려 들지도 않습니다.
돌아보면 너무 부끄럽기만 하지만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나는
이제 너무 낯설어 도무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바뀜이 오늘 사울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기가 바꾼 것이 아니라 바뀐 겁니다.
자기를 바꾸려고 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바꾸려고 한 것이고
안 바꾸면 죽이려고 하던 그였는데,
그런데 성령께서 안 바뀌려는 사울을 바오로로 바꾸시고,
사울의 적대자였던 예수를 바오로의 주님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나니아의 말처럼 하느님께서 사울을 성령 충만하도록 해주셨고
그 성령께서 눈멀었던 사울을 다시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시력을 되찾았다는 뜻도 되겠지만
예수를 구원자요 자기의 주님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고 하듯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던 사울 안에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낙인을 찍어주신 것입니다.
완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뜻이지요.
사울이 바오로로 바뀐 뜻이기도 하고요.
저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그런 일이 닥칠까봐 두렵기도 하고,
두렵고 떨리지만 아마 기쁠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