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선교의 주보인 하비에르 성인의 축일을 기해
복음 선포에 대한 바오로 서간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간은 비딱한 시선으로 위의 오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어찌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막말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그러면 수치거리입니까?
내가 감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것\일이 아닙니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의무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복음을 사랑 때문이 아니라 의무 때문에 선포한다는 것인가요?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자기는 불행할 거라고 하는데,
그러면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그것을 의무로 주신 하느님이 벌주신다는 건가요?
비딱하게 이해하거나 깊이 이해하지 않으면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의 체험을 생각하면 이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체험 말입니다.
이 체험 후 바오로 사도는 박해자에서 주님 사랑의 포로가 되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랑의 포로가 되면 스스로 노예가 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한 일은 시키지 않아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의무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하는 이의 요구에 의한 의무가 아니라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사랑의 요구에 의한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식을 빼앗긴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해주고 싶어도 못하는,
그런 극단적인 불행을 예로 들지 않아도 알 수 있듯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하고픈 것을 못할 때
불행하기 때문에 자기의 사랑이 강제하는 것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이 그의 불행이기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뒤집으면 불행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싶어도 못 전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복음을 접하지도 못한 사람이기에 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접했다 하더라도 복음이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기에 전할 수 없으며
불행한 사람이 전한 복음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기에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그렇고,
그리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하베리오 성인도 그렇고
주님의 복음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고 참으로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더없이 행복하게 한 주님의 복음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 복음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다른 이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천 년 전의 행복했던 바오로 사도,
1,500년이 지나 또 행복했던 하베리오 성인.
이 행복했던 사나이들을 우리는 오늘 부러워하며 기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