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평화
지금으로부터 11년전 제 나이 21살때
저는 군대에 있을 때였었습니다.
사실 어느 공동체에서도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군대라고하는 공동체에서도 이런저런 사람
여러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저도 군생활을 하면서 고향이 대구인 제가
목포가 고향인 고참을 만나게 되었고
그 고참이 한 성격한 탓에 밑에 후임병들을
군기잡는 군기반장이었습니다.
역시 저하고의 관계도 순탄치 못했습니다.
각종 폭언과 가혹행위. . . 그 고참과 나는 3개월
차이, 즉, 소위 말하는 맞고참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흐르고
국방부의 시계도 여느처럼 흐른다는 사실과 함께
그 고참도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 전날 밤 제 마음을 담은 편지와 함께
그 고참이 즐겨 피웠던 담배 두갑을 사서
편지와 함께 포장해서 전역 당일날 가기전
그 고참에게 전역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참은 선뜻 놀라고 당황해 하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5분동안
"받아라", "못 받겠다"..... 하면서 실랑이?를 벌인끝에
결국에는 그 고참이 제 선물을 받게 되었는데
그 순간 믿기 힘든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제 눈을 의심을 정도였으니깐요
그 고참의 눈에서 붉어지는 눈시울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동안 내가 너한테 많이 미안했었다.....미안하다".
전 그때일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이 일어난일로 믿고 있습니다.
전 지금도 생각할 때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받아들임"
그것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의 약점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또한 더 나아가서 그 고참의 약점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받아들였을 때의 그 평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였습니다.
하늘나라는 몸과마음에 트러블이 없고, 어려움이 없고
인관관계에서도 나를 좋아하고 지지해주고
인정해주는 바로 그곳. 저에게는 바로 그러한 곳에
있기 보다는 군대라고 하는 곳에서 온갖 어려움이
있던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그러한 받아들임이 내 인생의 철전지의 원수가 될수 있었고
그 고참 이름조차도 생각하고 싶지 않는
그러한 관계가 될수 있었지만
그러한 삶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던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의 말씀에서도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린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어찌 본다면 저와 그 고참하고의 관계는 위의 말씀에서 처럼
늑대와 새끼양의 관계, 표범과 새끼염소와의 관계,
사자와 송아지와의 관계, 곰과 암소와의 관계,
그리고 어린아이와 살무사와의 관계..
아니 그 보다 더 지독한 원수 관계가 될수도 있었지만
"받아들임" 바로 그것이 파멸의 관계에서 평화의 관계로
뒤바뀌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수 많은 인내가 필요로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의 군생활은 결코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제 2독서에서도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이렇게 인내에
대해서 말하고 난 뒤 이어서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라고 말씀하시며 "받아들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인내와 받아들임"이 있는 곳에
평화가 있고 기적이 있으며 또한 하늘나라도 함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가 곧 받아들임이며, 받아들임이 곧 회개입니다.
그러한 회개가 있고, 받아들임 있는 곳에는 하늘나라도 있습니다.
또한 세례자 요한은 다가오는 바리시아들과 사두가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임"이 어떠한 "받아들임"인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리사이들도 사두가이들도 그들 모두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것이 아니라
세속과 자신의 욕망과 권력등등.. 세속의 가치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안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못할 것입니다.
과연 오늘 우리는 어떠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안에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갖가지 어려움들을 인내할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