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부활의 길을 가기 위해 주님께서 먼저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하고,
그리고 그 길은 우리도 따라야 할 길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제 당신의 십자가 길을 막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그 길을 가라고 초대하시고,
당신의 12 제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초대하십니다.
복음은 분명히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런데 주님께서 당신의 뒤를 따르라고 초대를 하셔도
얼씨구나! 하고 즉시 따라 나설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저도 그렇게 따라 나서지 않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길을 기꺼이 가지 못하고 마지못해 가는 이유는
이 길이 우리에게 <사랑의 길>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길이 사랑의 길이 아니라 주어진 길이면
아무리 그 길이 부활을 위한 길이라고 해도 기꺼이 가기 어렵습니다.
부활은 나중이고 수난과 죽음이 먼저이기 때문이며,
부활은 미래이고 수난과 죽음은 현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따르게 되면
사랑이 수난과 부활의 구분을 한 번에 뛰어넘게 하여
우리는 수난의 길이건 부활의 길이건 기꺼이 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수난은 사랑을 더 강렬하게 하여
고통과 희열喜悅을 동시적으로 느끼게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이왕이면 사랑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
왜냐면 어차피 맞을 매 먼저 맞는 것이 좋다는 태도로
일찌감치 수난의 길을 가는 사람도 있고,
어차피 가야 하지만 너무도 싫어서 미적, 미적대다가
늦게야 떠나는 사람도 우리 가운데 있겠지만
우리는 어차피 수난의 길로 부활의 길을 가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수난의 길로 부활의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진 길>입니다.
<주어진 길>이라도 거부하거나 불평 없이 간다면
그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더 훌륭한 우리의 길, 더 행복한 우리의 길은 사랑의 길이지요.
오늘 내 앞에 십자가의 길이 놓여 있다면
우리는 오늘 이 길을 사랑으로 떠나도록 합시다.
이왕이면 <주어진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을 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