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오늘의 호세아서는 주님을 알자고, 주님을 알려고 힘쓰자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전혀 모르던 분을 새로이 알자는 뜻은 아닐 겁니다.
그것은 다른 것을 더 알려고 들지 말고 주님을 알자는 뜻일 겁니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주님께 대해서는 관심 없는 사람에게,
다른 책들은 파고들면서 성경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사람에게,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뒤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도
주님의 말씀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일 겁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또 다른 뜻,
주님을 알기는 아는데 올바로 알자는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호세아서에서 주님은 이렇게 호소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사람들이 주님을 알기는 아는데 잘못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기는 아는데 뭘 바라시는지는 모르는 겁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제물을 바라신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바라시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방학을 이용하여 피정을 지도하러 서부에 갔습니다.
머무는 동안 이집 저집에서 저를 초대해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 처음 간 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기에
사람들은 제가 먼저 간 집에서 무엇을 잘 먹었는지를 물었지요.
그래서 저는 가는 집마다 게장을 먹어야 했고,
맛있게 먹어주기를 바라셨기에 열심히 먹어야 했으며,
덕분에 돌아올 때는 입천장이 다 까져 며칠 고생해야만 했지요.
그런데 저는 그것만 좋아한 것이 아니고, 더 좋아하는 다른 것도 있었지요.
이때 무엇을 제가 더 바라는지 그분들에게 솔직히 알려드렸으면
뭘 할까 고민하게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이처럼 주님께서는 오늘 당신이 뭘 제일 바라시는지 알려주십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우리의 신의와 예지입니다.
우리 자신을 대신하는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과 지식입니다.
신의와 예지는 영어로 ‘Love’와 ‘Knowledge’로 번역이 되는데
우리가 당신을 참으로 사랑하고 올바로 아는 것을
어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보다 주님께서는 더 바라시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님은 또 다른 차원에서 당신의 바람을 알려주십니다.
율법의 의무는 충실하면서 이웃을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보다
율법의 의무는 불충실하지만 겸손한 사람을 하느님은 더 옳게 여기신다고.
이것을 뒤집어 얘기하면 이렇게 이해해도 될 것입니다.
교회의 의무는 잘하지만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보다
교회의 의무는 잘 못하지만 참으로 겸손하게 하느님께 나아오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더 예뻐하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교무금이나 주일헌금 잘 내고,
주일미사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잘 나오며,
본당 신부가 원하는 여러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그것으로 으스대고 남을 무시하며 가난한 이웃에게는 인색하다면
본당신부는 좋아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싫어하시는 짓을 하는 것이고,
교회의 의무는 잘 하지만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교회 안에 이런 생색주의가 많아졌습니다.
교구에서는 일하지만 본당에서는 일하지 않고,
생색이 잘 나는 일은 하지만 별로 드러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며,
돈으로는 한 몫을 하지만 정말 자기를 희생해야 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일수록 돈 없고, 능력도 없기에 대단한 일은 못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궂은일에 자기의 시간과 노고를 바치는 사람,
큰돈으로 이웃을 도울 수 없지만 독거노인에게 전화 한 통화 해주는 사람이
그래서 더 귀하고 하느님께서는 더 예쁘게 봐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