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오늘 외치십니다.
“나자로야, 이리 나와라.”
사람들에게 이르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요한복음이 대체로 그렇지만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 많고,
단순한 공관복음에 비해 얘기들이 억지스럽고 수다스럽습니다.
오늘 나자로의 얘기도 다른 복음에 나오지 않는 억지스런 얘깁니다.
그래서 이 얘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이 얘기가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은 이 얘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오늘 미사의 감사송에 이것이 잘 나와 있는데, 이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
친구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며 우시고,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으며,
인류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거룩한 신비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이끌어 주셨나이다.”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같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희노애락을 같이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그의 처지를 나의 처지 삼고,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 삼고,
그의 슬픔을 나의 슬픔 삼고,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 삼는 것이 사랑이지요.
다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으로서’
우리를 무덤에서 불러내시고 새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참 인간이시며 참 하느님인 분이신 겁니다.
참 인간으로서 주님은 라자로와 마찬가지로 돌아가실 거지만
참 하느님으로서 주님은 라자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십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불러내시는 이 소리는 틀림없이 힘차고 권위가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부르심을 받는 라자로는 무덤에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무로부터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인데
이제 다시 무덤으로부터 새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그리고 두 번 모두 한 말씀에 의해 생명으로 부르심 받습니다.
그런데 무덤에서 새 생명으로 부르심 받는 게 인간 존재라는 것은
인간은 반드시 죽어야 새 생명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스스로 무덤에서 나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라자로가 아프다는 얘기를 진작 들으셨지만 주님께서는
괜히 미적거리시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야 가십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이상하고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새 생명을 얻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완전히 죽을 때까지 우리가 죽음의 길을 가게 내버려두십니다.
그것도 숙성된 죽음이 되도록 나흘이나 더 죽음 가운데 내버려두십니다.
우리가 괴로워 죽을 지경일 때 빨리 꺼내주시지 않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 인간이 완전히 죽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데 우리 인간의 도움을 받으십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고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이 죽어야 할 존재이면서도
다른 인간이 죽음에서 풀려나도록 돕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타와 같은 믿음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