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레치오의 프레스코 - 성탄
작가 : 익명
소재지 이태리 그레치오 성당
성(聖)미술의 주제는 크리스챤 신앙에 관계되는 모든 것이 포함되지만 그중에 가장 많이 다룬 것이 주님의 성탄과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비가 신앙의 핵심이긴 해도 우리가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반면에 성탄은 그 자체가 생명의 탄생이라는 축제성이 있기에 많은 작가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 주제를 다루어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이 작품은 다른 작품에 비해 좀 특별한 것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다른 작품이 표현하지 못하는 작가 나름의 성탄 신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작품은 성탄을 다룬 화려하고 경쾌한 작품에 비해 너무 단순하고 초라하지만 성탄의 프란치스칸적인 의미를 표현했다는 면에서 대단히 탁월하며 성탄의 복음적인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성 프란치스코는 1223년 성탄을 아씨시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한 촌락인 그레치오에서 지내셨다. 이곳은 오늘도 사람의 인적이 드문 오지에 속하는 곳이며, 당시에는 척박한 자연환경으로 가난한 농민들이 사는 곳이어서 성탄이 되어도 미사 참석이 그리 쉽지 않은 곳이기에 성인은 버려진 이곳 사람들에게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자 이곳을 찾으셨다.
마침 이 마을에 심성이 착한 요한이라는 신자가 있어 그에게 성탄 저녁 주님의 성탄을 재현할 수 있도록 나귀와 동물들, 짚북데기를 준비하도록 부탁해서 마을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성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셨다. 이어서 성 프란치스코가 부제로서 복음을 낭독하면서 성탄의 기쁨을 선포하자 많은 참석자들이 법열에 가까운 큰 기쁨에 젖었으며 전승에 의하면 이때 성인이 준비한 말구유에 어린 아기가 예수님으로 변해서 성탄의 신비가 현실로 재현되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이 사건이 있은 지 두 세기가 지난 후 어떤 무명화가가 프레스코 형식으로 그린 것인데, 그 내용면에 있어 프란치스칸적인 성탄 신학을 완벽히 표현하고 있으며 단순하고 소박한 형식의 프란치스칸 미학적 표현을 하고 있다.
작가는 다른 성탄 작품의 대종을 이루는 루카나 마태오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성탄의 내용이 아니라 작가 나름대로의 성탄 신학을 압축해서 표현하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먼저 성모님은 젖으로 가득 찬 풍만한 젖가슴을 풀어헤치시고 젖을 먹이신다. 여기에서 작가는 성탄에서 “ 마리아와 성체” 라는 엉뚱한 시도를 하고자 했는데, 젖으로 표현되는 모성을 모든 생명을 싹트게 하는 대지(Earth)와 연관시키면서 , 대지가 모든 씨앗을 안아 생명이 싹트게 하듯 성모님은 인성을 취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당신의 젖이란 대지에 안아 젖을 먹여 키우신다.
이렇게 천상 생명의 텃밭과 같은 성모님은 하느님의 아들을 키우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개방된 자세로 젖가슴을 풀어 아기 예수님에게 젖을 먹이고 계신다.
성모님의 풍만한 젖가슴은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리라는 천사의 알림을 들었을 때 “주님의 종이오니 지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고 응답하신 성모님의 약속 실현이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의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은 마구간이 아닌 땅바닥에 앉아 계시며, 아기 예수님은 말구유가 아니라 사제가 성찬식을 통해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제단의 중앙에서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젖을 먹고 계신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마리아는 대지(大地)의 상징으로 이 세상을 구원할 생명으로 오신 예수 아기에게 생명의 젖줄을 제공하고 있으며, 성모님의 도움으로 성장한 예수님은 언젠가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을 선사하시고, 사제가 봉헌하는 미사에서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마치 당신이 성모님의 젖을 먹고 성장하신 것처럼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주심으로서 신앙에 성장케 하신다는 것이다.
성모님의 젖을 먹고 성장한 예수님은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우리를 성장시키신다. 작가는 성모님의 역할을 모든 생명의 씨앗을 받아 꽃피우고 성장시키는 대지, 또한 하느님 백성을 안아 키우는 대지의 역할을 성체성사와 연관시키면서 성탄을 교회 전례 안으로 끌어들인다.
아기 예수님을 감싸고 있는 의복은 둘둘 말은 포대기 형상인데, 이것은 중세기 풍습에 있던 것을 그대로 재현 한 것이다. 중세기 풍습에 아기가 태어나면 모든 면에 있어 너무 허약하기에, 철저한 보호가 필요한 신생아의 안전을 위해 헝겊이나 포대기로 둘둘 말아 어떤 충격이나 예기치 못한 사고에서도 아기가 다치지 않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다른 중세기 성화에서도 간혹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는 아기 예수를 볼 수 있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관조하고 이해한 작가는 복음의 어떤 부분에 나타나고 있는, 하늘의 천사, 목동들의 경배, 동방박사의 방문 등을 인용해서 그럴듯한 볼거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서 전체에 나타나고 하느님의 아들 예수에 대한 참된 이해를 시도하고 있다.
작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 포대기로 둘둘 말아 보호해야 할 만큼 여느 아기들의 약함을 고스란히 지니신 것처럼, 예수님은 성탄을 통해 우리 모두가 일생을 고통스럽게 지고 살아야 하는 허약성에 동참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모 어머니의 젖을 빨고 계시는 아기 예수님의 머리 후광엔 금빛 광채가 아닌 너무도 핏빛이 선명한 십자가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의 참 의미, 성체성사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인간에게 주시고 마지막 자신의 생명까지 십자가에 바쳐 하느님 사랑의 진수를 증거 해야 하는 그분의 운명을 드러내고 있다.
여느 아기처럼 성모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아기 예수님은 장차 인류 구원의 사명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면서 여느 인간처럼 철저히 허약한 모습으로 성부의 뜻을 받아들이는 구세주의 상징이다.
그분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올리브 동산에서 피땀이 흐르는 번민과 공포 속에서 아버지께 그 고통스런 사명을 면케 해달라고 기도하셨고(루카 22, 42), 십자가 위에서 애타는 기도를 외면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매달은 아버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시며(마태오 27, 46) 세상을 하직하셨다.
작가는 여기에서 엉뚱하리만큼 대담하게 성탄의 신비의 진면모를 제시하고 있다.
바로 이 세상에 구세주를 모셔오기 위해, 또한 생명의 씨앗을 받아 키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상징으로 젖가슴을 열어 아기 예수님을 흡족히 젖을 빨리는 성모님처럼 자신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탄생시켜야 하는 크리스챤의 사명을 제시하고 있다.,
성모님이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모셔오는 도구로 선택되어 자신의 젖으로 그리스도를 키운 것처럼 크리스챤들도 복음의 향기로운 삶의 모범으로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탄생시켜야 한다.
아래편에 앉아 계신 성 요셉은 성모자를 바라보시면서 구세주를 이 세상에 모셔오기 위해 선택된 자신의 역할의 의미성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성 요셉은 이 작품을 바라보며 성탄의 의미성을 찾는 관객으로서 지녀야 할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중세기 대부분의 성화가 그렇듯 작가도 성모님의 동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요셉 성인은 상대적으로 무능한 늙은이로 그린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환시 중에 요셉 성인을 만나고 그분의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에 매혹되었기에 당시 유행하던 무력한 요셉 성인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
작가는 대부분의 성탄화가 복음에 나타나는 성탄 장면의 합성 즉 천사, 목동 삼왕을 등장시켜 신나는 축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성가족이 주연인 베들레헴의 성탄과, 13세기 초반 성 프란치스코가 연출한 그레치오의 성탄이라는 2막의 드라마를 통해 15세기 교회에 필요한 성탄 신학을 전개시키고 있다.
이 장면은 토마스 첼라노가 쓴 <성 프란치스꼬의 생애> 제 1부 30장에 나타나고 있는 내용이다. 말구유를 만들어 성탄 준비를 한 장소에 민초의 삶을 살아가던 그레치오 시민들이 모여 있다. 이들의 복장은 남녀 구분이 없이 붉은 색과 푸른 색조의 옷을 입고 있다. 붉은 옷을 입은 남자와 푸른 옷을 입은 남자, 붉은 옷을 입은 여자와 푸른 옷을 입은 여자가 함께 서 있다.
중세에 있어 붉은 색은 인성(人性)의 상징이고 푸른색은 신성(神性)의 상징인데, 주님이 아기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분이 여느 인간들의 인성에 동참한 것이기에 , 성탄은 하느님이 인성에 동참하심으로서 인간은 하느님의 신성을 선물로 받게 되어 하느님과 인간이 형제로서 서로 합일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사부대중(四剖大衆)은 어떤 신분이나 성별의 구분이 없이 다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인성을 지닌 신앙의 형제들임을 표현하고 있다. 이 사부대중의 일부는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계신 프란치스코를 바라보고 일부는 미사를 거행하는 사제를 향하고 있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칸 성탄 신학이 명백히 제시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베들레헴 말구유에서만 탄생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미사성제를 통해 빵과 포도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분임을 강조한다.
앞의 작품에서처럼 성모님의 젖을 빨고 있던 아기와 꼭 같이 포대기로 둘둘 말린 아기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워 성 프란치스코의 경배를 받고 계신다. 여기에서 작가는 성탄은 베들레헴의 회상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크리스챤들의 현세 체험임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현시성을 띄고 오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성인의 전기를 쓴 첼라노의 기록에 의하면, 성인은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기 위해 특별히 마음 준비를 하였고, 그 거룩한 밤을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심히 보내면서 그리운 마음에 아기 예수님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며, 아기 예수 예수께 대한 측은함에 가슴이 뭉클해져서 마치 아기에게 말하듯 예쁜 말을 더듬거렸다. 예수님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에 있어 꿀맛과 같았다.”( 2 첼라노 199)
앞의 작품의 구석에 성 요셉을 배치한 것처럼 이 작품에는 성녀 글라라를 배치했다. 성녀는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요, 영적 여정의 동반자로서 글라라 수도회의 창설자이시기에 또 다른 모습의 프란치스코로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성녀를 등장시킨 것은 성녀의 생애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일화에서 근거하는 것이다.
성녀는 스승인 프란치스코의 사후 오래 동안 사시면서 수도회의 기초를 놓으셨으며, 성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주님을 따른 것처럼 성녀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성덕의 길로 나아갔기에 성인의 모든 행적은 성녀에게 있어 나침반과 같았기에 성탄에 관한 것 역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겼다.
성녀께서 지상 삶을 마무리 하시던 1252년 성탄날 밤에, 병상에 누워계시던 성녀께서는 성당에서 거행되던 성탄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홀로 병상에서 주님께 투덜거렸다.
“주님, 당신과만 있는, 이 내버려진 몸을 보십시요.” 그러자 본인이 그 자리에 참석해 있듯이 모든 형제들과 신자들이 성탄 미사를 거행하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으로부터 들려오는 오르간 소리와 형제들이 부르는 성가의 후렴과 성무일도와 미사 전례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성녀는 큰 위로를 받았다.
자매들이 성당에서 돌아왔을 때 성녀는 마음의 기쁨에 넘쳐 그들에게 말하였다. “자매들이여, 당신들은 나를 혼자 내버렸지만, 주님께서는 침상에 누워 꼼짝을 못하는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 라자로 이리아르떼의 “ 프란치스칸 소명 ” 60쪽 참조)
뒷발치에 성녀를 등장시킨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외골수로 따른 성녀에게 , 성프란치스코의 성탄 체험이 재현된 것처럼 오늘도 프란치스코 처럼 주님의 길을 걷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선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격려의 약속이라 볼 수 있다.
작가는 성인의 삶에 있었던 그레치오의 성탄 체험을 2세기 후의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구상할 당시의 교회는 복음적 생기를 잃고 부패와 무능의 나락에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무식하고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의 볼품없는 처신은 복음대로 살려던 순박한 신자들에게 참으로 교회에 그리스도가 계시는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만들면서 성서에 바탕을 둔 참신한 복음적 삶을 외치는 이단들의 가르침에 솔깃하던 시대였다. 이런 현실에서 작가는 당시 기성 교회에 실망을 느끼며 회의하는 선량한 신자들을 붙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에 대한 이해가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여겼기에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되었다.
성 프란치스코 당시의 교회 역시 작가가 살던 시대와 비슷한 문제가 많은 교회였으나 성인은 부도덕한 성직자들이 만드는 분심 스러움을 외면하고 성직자가 거행하는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성덕의 길로 나아간 것처럼 아무리 실망을 주는 교회의 현실에서도, 성찬을 통해 오시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교회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확고한 희망의 약속을 하고 있다.
오늘의 성탄은 뜻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염려 하는 대로 너무 상업화 되어 있기에 성탄의 기쁨은 소비문화에 대한 매력과 직결되어 있다. 성탄절 대목을 노리는 고급 백화점의 쇼 윈도우는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가 없는 성탄 축제의 가능성을 매력적으로 시사하고 있으며 교회 역시 서서히 이런 상업주의에 휘말리고 있다.
교회 마다 경쟁이나 하듯, 더 빨리 더 화려하게 사람들을 교회로 부르기 위해 현란한 조명과 볼거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탄생을 전하는 교회에서도 베들레헴의 소박함은 찾기가 어려우며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가 아닌 , 인간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만든 인조 예수를 한껏 부각시키고 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을 너무 강조하는 오늘의 성탄 정서는 베들레헴의 성탄은 주일학생들을 위한 연극 주제 정도로 등한시되면서 성탄 행사의 대형화, 성탄 장식의 호화로움으로 또 다른 의미의 물량적 매력을 강조하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다.
갈수록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를 만나기 어려워지는 현실에서 작가는 진정으로 아기 예수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게 성 프란치스코의 안내에 따라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초대하고 있다. 떠들썩하고 흥청대면서 외치는 허황한 초대가 아닌 작품에 나오는 그레치오의 동굴처럼 조용한 가운데 소박하게 젖을 먹이시는 성모님을 통해, 구유에 누운 아기를 경배하는 성 프란치스코를 통해 복음에 나타난 성탄 체험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이 작품을 효시로 교회 미술에 젖과 대지 그리고 성체성사를 연결시키는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당시 예술 작품은 제작에 비용이 많은 드는 순서로 모자이크, 유화 프레스코(Fresco)가 있었는데, 이것은 가장 돈이 들지 않는 것이기에 프란치스칸들이 즐겨 사용해서 프란치스칸 예술 기법의 대명사처럼 정착하게 되었다. 회반죽을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시키는 이 기법은 이태리 말로 “신선한(fresco)”이라는 의미대로 단순하면서도 검박하고 경쾌하기에 프란치스칸들에게 더 없이 사랑받는 기법이었다.
너무 기름지고 많은 양념으로 만들어진 음식은 계속 먹기가 어려운 것처럼, 성탄의 의미를 화려한 축제로만 강조하는 이 시대의 성탄 정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이 작품은 참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만상이 잠든 때”의 베들레헴의 평화로운 분위기로 우리를 초대한다. 이 작품을 응시하다 보면 성체성사로 이어지는 성탄 신학의 정리와 함께 말구유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성 프란치스코가 체험한 조용하면서도 벅찬 영적 환희를 맛볼 수 있다.
작년 성탄절엔 루미나리에(Luminarie) 라는 성탄 조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더니 올해는 루체비스타 (Lucevista)라는 새로운 조명이 성탄의 축제 분위기를 한껏 밝히고 있다. 그러나 축제의 성격이 강조되고 조명이 현란해 질수록 점점 성탄의 알맹이가 실종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 작품은 크리스챤으로서 성탄의 의미를 너무도 정확하게 압축시켜 전달하는 모범 답안 역할을 하고 있다.
성탄의 참된 의미를 고요한 마음으로 응시하는 사람에게 프란치스코의 마음을 사로잡은 주님은 오늘도 누구나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심을, 주님은 언제나 교회 전례를 통해 성체성사로 오시기에 크리스챤의 삶은 이어지는 성탄 축제의 기쁜 반복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성탄절의 의미라면, 성탄축제가 끝나는 마지막 토요일의 입당송은 다음과 같이 담백하고 고요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주님, 주님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내려오셨나이다.”(지혜서 18, 14-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