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예수의 세례 (1596-1600)
작 가 : 엘 그레코(1541- 1614)
크 기 : 350 X 144cm 유채
소 재 지 :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오늘날 그리스 영토이며 한때 베네치아 공화국의 속주였던 크레타(Creta)에서 태어난 작가는 비잔틴(Byzantine) 예술의 영향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이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화풍에 접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였던 베네치아로 가서 유럽 전체에 영향을 주던 티치아노(성화해설 20번 : 1490- 1576)와 틴토레토(성화해설 69: 1519- 1594)의 예술에 접하면서 베네치아 화풍의 특징인 화려한 색채 처리를 배우고, 다시 로마에 가서 미켈란젤로 (성화해설 26번: 1478- 1564)와 당시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교황이 너무도 사랑해서 평신도의 신분인 그를 추기경으로 임명코자 했던 라파엘로의 (성화해설 14번: 1483- 1520) 화풍에 접함으로서 명실 공히 당시 정상의 모든 것을 체험 한 후 교회 예술의 후원자로 등장한 필립 2세가 있는 스페인에 정착하게 된다.
그는 위와 같이 당시 수준급 예술의 모든 것을 섭렵했을 뿐 아니라 신학 용어인 그리스와 라틴어까지 소화함으로서 신학에 바탕을 둔 신앙을 예술로 표현할 수 있는 자질을 지닌 화가가 되었으나 그는 엉뚱하게도 그가 섭렵한 어떤 것과도 비길 수 없는 독창적이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작품은 현대에 이르기 까지 영향을 미치고있다.
이작품은 당시 마드리드에서 고급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던 아우구스티노 수도원 성당의 제단화로 그려진 것이며, 필립 2세의 요청에 의해 그린 것이다.
예수의 세례 사건은 그분 공생활의 시작에 해당하는 행위이며,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음을 의미하는 그리스도 이해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한낱 인간에 불과한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아야 했는가라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워 당황해 했던 것이어서, 마태오 복음에 보면 (마태오 3, 13- 17)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사실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감회를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불편한 심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요한이 세례를 집전하시자 하늘이 열리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는 성부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으로 주님의 우위성을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즐겨 다룬 종교화의 특징인 인물을 길쭉하게 표현하고 세로로 직사각형 모양을 만들어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먼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데, 물이 좀 흐르고 있지만 둘은 단단한 바위위에 있으며 예수님은 두 무릎을 꿇은 자세가 아닌 바위에 한쪽 무릎만 의지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은 고행으로 깡마른 체구에 매우 강인하고 엄격한 표정으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은 비록 인간에 불과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루카 7, 28)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초세기 신자들에게 있어 가장 감동을 주던 인물은 구약의 엘리야와 신약의 세례자 요한이었으므로 작가 역시 이 작품에서 요한의 역할이 하느님의 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들러리의 역할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와 또 다른 인간적인 기품과 열렬하고 강직한 신앙을 가진 분임을 강조하고 있다.
두 사람 가운에 천사가 중간에 서서 그 주위 천사들과 함께 붉은 천을 주님위에 받치고 있는데, 이것은 주님의 수난을 예고하는 것이다.
예술가이기 이전 나름대로의 신학적 지식이 있던 작가에 있어 주님의 세례란 수난의 시작이 아니라 이미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수난의 깊은 의미가 내재된 것임을 알았기에 이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요르단 강에서 주님께서 받은 세례란 당신이 “죽음으로써” 받을 세례를 예고하기에 (루카 12, 50: 마르코 10; 38) 예수님의 공생활은 바로 이 두개의 세례 사이에 놓은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신학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려 왔다. 그 불이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루카 12, 49)”
예수님의 세례 사실을 보도하는 모든 공관 복음 사가들은 세례의 순간에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오시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루가 3, 22)이라고 하신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가장 윗 자리에 성부께서 계시고 요한의 손위에 흰 비둘기 모양의 성령께서 함께 하고 계신다.
작가는 여기서 세례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일이 아니라 성부, 성령의 협력으로 이루어진 삼위일체적인 사건임을 전하고자 했다.
세례자 요한은 조개껍질에 물을 담아 세례를 집전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상징이며 희랍 신화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미(美)의 여신인 아프로디테가 오늘의 키프로스 섬에 있는 바포 앞바다 파도 속에서 조개를 타고 올라왔다고한다. 이 여신의 그림으로 유명한 것은 보티첼리의 작품인 “비너스의 탄생”이 있다.(성화해설 5번)
아프로디테는 로마 문화에 와서 비너스가 되며, 미와 생명의 상징이었기에 이것이 그리스도 문화권으로 들어오면서 생명과 순례의 상징이 된다. 작가는 세례성사의 의미가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의 손에 조개껍질을 들렸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모든 상징은 자기만의 고유한 것만 아니라 다른 문화권에서 정착된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아량이 있기에 이교 신화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상징을 무리 없이 수용함으로서 풍요로움을 더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10 여 년 전인 1586에 제작한 “오르가즈 백작의 매장”(성화해설 25번)에서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이 있는 지상 셰계와 오르가즈 백작의 영혼이 올라간 천상의 세계를 극명히 분리해서 제작했는데, 이 작품 역시 같은 기법을 사용했다.
작가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곳은 지상이기에 엄격한 자연법칙을 적용해서 모든 것을 확실히 표현하고 자리매김을 했다. 주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바위 위에 서 계시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확실한 지상의 상징이다. 천상의 세계는 지상과 전혀 다름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작가만의 독창적인 기법을 개발했다.
주님과 세례자 요한의 가운데 있는 천사를 포함해서 지상의 인물들이 표정이나 모든 것이 하나같이 선명하게 표현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상단 천상의 인물들을 모두 마술 거울에 비친 것처럼 일렁거리며 인체 비례 역시 이상적인 체형을 표현하던 (성화해설 60)르네상스의 규범을 완전히 벗어나 하나같이 길쭉한 모습으로 불균형의 표현을 하고 있다.
상단의 중앙 부분엔 성부이신 하느님께서 천사들의 옹위 가운데 좌정해 계시는데, 그 주위엔 얼굴만의 광채가 아니라 그 주위 인물들에게 까지 빛을 던질 수 있는 환한 광채가 있다. 이것이 작가의 천재적 발상인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작가는 당시 유럽 예술의 최고를 다 섭렵했으나 당시 인기를 끌던 라파엘로와는 전혀 다른 자기만의 작풍을 창출했다.
이것은 모든 것이 선명하면서 유한한 지상 공간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공간인 천상을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양식 언어로 볼 수 있으며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다음 성서 구절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고린 13, 12).
작가는 이 작품에서 환영(幻影)적인 것을 시각화하여 복음적 메시지인 천상에의 그리움을 키우는데 이용했는데, 이것은 매우 독보적인 창작이며 영적 세계의 설명과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는 당시 실세이며 예술 애호가인 필립 2세의 호감을 얻기 위해 무척 노력했으나, 철저히 트렌트 공의회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을 큰 사명으로 여긴 왕에게 작가의 그림은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공의회 정신에 위배되었기에 탐탁히 여기지 않아 작가를 실망시켰다.
그러기에 그는 왕궁을 위하여 일할 수 는 없었으나 1576년부터 톨레도를 중심으로 주문이 끊이지 않는 인기 절정의 화가가 되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고 세계의 중심은 스페인이었으며 작가가 활동하던 톨레도는 스페인 가톨릭의 중심이었기에 작가의 영향은 대단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아픔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소신에 충실하기위해 그는 초인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날 그는 하루 종일 굶은 채 기도하면서 천상적인 비전(Vision)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며 몰두했었다. 이 과정에서 인기 있는 화가로서 모은 재산은 손아귀의 모래가 빠져 나가듯 다 없어졌으나 그는 이것도 생각지 않고 그림에만 몰두했으며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시대에 완성된 것이다.
죽음의 순간 넉넉해 보이던 그가 남긴 것은 모직 외투와 무명 외투, 바지 몇 벌 뿐이었으나, 그는 이런 적빈의 상태에서 천상에의 큰 그리움에 충만하고 몰두했기에 어떤 작가보다 더 영적으로 풍요로운 인생을 즐겼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의 삶을 반영하고 있다는 면에서 작가의 작품 세계와 작품이 일치한다는 드물게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며, 소신을 굽힘이 없이 자신의 작품에 충실키 위해 노력했던 삶이 수도승과 같은 구도적인 작가로 여겨지면서 작품에 감동을 더하고 있다
작가의 이런 작품은 현대 예술가 특히 피카소의 작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