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성모영보( Annunciatio : 2001 )
작 가 : 프란츠 프란치스코 (Franz Franciscus)
크 기 : 240 X 180 cm): 유채
소 재 지: 화란 우트레트(Utrecht) 카타리나 수도원 박물관
화란 (Netherland)교회는 세계 교회 중에서 좀 특별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다 보다 낮은 육지를 두었기에 언제나 자연과 싸워야 했던 이들의 역사 안에서,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처럼 언제나 앞선 생각을 하는 습관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것은 종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가톨릭 국가요 종교재판으로 개신교를 용납하지 않던 스페인의 지배에 있다가, 개신교 세력이 승리하면서 개신교 국가가 되어 19세기 중엽까지 가톨릭이 개신교로부터 박해를 받는 처지가 되어 서로가 서로를 박해하는 부끄러운 악순환을 공유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열린 사고는 어떤 의미의 종교적인 광신도 용납할 수 없었기에 현대에 오면서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모두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면서 일치의 차원은 아니어도 화합의 차원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세계에서 드문 교회가 되었다.
교회가 국교 형식의 다수화가 되면 항상 침체와 부패의 나락에 빠지기 쉬우나 반대로 박해를 받은 교회는 정화되고 성장되는 것처럼 화란의 가톨릭 역시 이런 역사의 아픔을 통해 유럽 여러 나라 교회보다 더 건강한 교회가 되었다.
오늘날 양적으로도 두 교회 신도는 서로 반반으로 서로 다른 교회가 아니라 같은 신앙을 서로 다른 차원으로 표현하는 믿음안의 형제로 수용되고 있다. 이들의 앞선 사고는 교회 생활에도 드러나 공의회 후 “화란 교리서”라는 자체 교리서를 출판했다.
이것은 종래의 교리서가 하느님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하는데 비해 이 책은 인간으로부터 “탐구하는 인간”, “하느님을 찾는 인간” 이라는 주제로 시작해서 제일 마지막에 하느님을 찾도록 전개되어 교황청에서 준비한 수정문을 부록으로 첨부해서 출판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신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접근하는 방법, 보는 관점이 새로워 진 것인데, 신앙의 획일적 표현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는 어리둥절한 면이 많으며 이러한 것은 사회생활에도 드러나 화란은 여러 면에서 유럽에서도 첨단의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전위적인(Avant- garde) 성격이 강한 화란 교회의 풍토에서 나온 것이며 현존하는 젊은 작가의 새로운 사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성모영보는 루카 복음 1장에 나타나고 있는 한 인간인 마리아가 하느님을 뜻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표현하는 너무 중요한 것이기에, 많은 화가들이 여러 화풍(畵風)으로 이것을 표현했으나 작가는 성서에서가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이 대단한 열정을 보이고 있는 발렌타인 데이(Valentine,s Day)의 풍습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날은 2월 14일로, 3세기 로마의 순교자 성 발렌티누스( Valentinus)가 순교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공교롭게도 겨울잠에서 깨어난 새의 암, 수컷이 서로 짝짓기를 시작하는 날인데, 14세기부터 연인들의 축제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선물로는 초콜릿이 많이 이용되는데 이것은 18세기 이태리 엽색가 카사노바(Casanova)가 사랑을 유발시키는 미약으로 초콜릿을 선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사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선물로 되었다.
성인과 엽색가를 연결시켜 만든, 신앙 안에서 보면 허황하기 짝이 없는 황당한 풍습이지만 오늘날 젊은이들이 여기에 대한 열광은 대단하다. 올해 우리나라에도 이날을 위해 1800억 원의 고급 초콜릿을 수입했을 만큼 온 세계 젊은이들에게 대단히 매력적이고 중요한 계기이다.
작가는 현대 젊은이들의 혼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있는 젊은이들의 정서를 미끼 삼아 신앙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 성모님은 발렌타인 데이에 연인의 선물을 기다리는 평범한 아가씨로 나타나고 있다. 옷매무새 , 얼굴 표정 어디로 봐도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아가씨이다. 그러나 그의 오른 손에 들고 있는 책이 바로 이 평범한 아가씨를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는 신앙의 인간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이 책은 성경책일 수 있고, 이 아가씨의 젊음에 큰 도움과 감동을 주고 있는 또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이 아가씨는 오늘날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젊은이로서,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며 이 목표를 달성하고자 노력하며 살아가는 많은 인간들, 위대하고 비참함이란 양면성을 지닌 인간의 모델이다.
위대함은 “인간의 모든 갈망은 결국 하느님을 위한 갈망이다”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씀처럼 전통적인 가치에서 보면 너무도 하찮고 평범한 삶에서도 무의식적으로 나마 진리를 살고자 노력하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이런 높은 삶을 갈망하는 것과 반대로 “마음은 간절하나 몸은 따르지 못한다.”(마르코 14, 38)라는 수난 전날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주님 말씀이 어울리는 언제나 유혹에 열려있는 허약성을 지녔기에 비참하다.
작가는 바로 이런 처지의 젊은이들에게 자기들이 열광하고 있는 축제 안에서 주님 부르심의 의미를 상기시키고자 한다. 이 아가씨는 천사의 부르심을 들으면서 천사를 바라보기 위해 선 글라스를 벗는데 이것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인간적인 편견에서 벗어나야 함을 표시하는 것이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라는 삼종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가브리엘 대천사는 어떤 화풍에서든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전혀 예외적이다.
길거리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러한 분방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젊은이의 모습이다. 머리에 무스를 바르고 유행이라면 무조건 대단한 관심을 보이며 따르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역기는 그런 젊은이의 모습이다.
오늘날 “훈남”, “꽃미남” 등 전통적으로 “남자답다”는 것과 전혀 다른 그런 모습의 연예인들은 많은 젊은이들의 혼을 빼앗아 가고 있으며, 오늘날 영상 매체는 젊은이들을 새로운 유행에 넋이 빠지게 만들어 이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 맹목적인 열광에 빠지게 만들고 있는데, 이 천사 역시 그런 모습이다.
오늘날 유럽 거리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인도의 풍습을 본 딴 젖꼭지에 고리를 단 차림새나, 육체미를 다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몸매를 보나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에게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파격적인 용돈 지출도 마다하지 않을 그런 젊은이이다.
등에 그려진 날개가 이 젊은이는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가브리엘 대천사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아가씨에게 호감을 보이기 위해 분홍빛 선물을 계속 불고 있다. 이 입김은 젊은이들이 흔히 하는 연인에 대한 프로포즈가 아닌 바로 성령의 상징이다.
작가는 전통적인 거룩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너무 세상의 모습에서 신앙의 중요한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젊은이가 보이는 사랑의 표시는 서양 역사상 대표적인 바람둥이로 평가되는 카사노바와 관련되는 그런 무의미하고 허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너무나 연결되는 것임을 표현하고 있다. 즉 진실한 사랑은 관능이나 쾌락의 선물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임을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다.
왼손으로 핑크빛 사랑을 계속해서 날리는 천사의 오른손은 하늘을 가리키면서 하느님을 참된 사랑의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다. 공공장소 벽면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예술성과는 거리가 먼 그런 평범하고 시시한 표현에서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루카 1, 35)
작가는 화란교리서가 전통 교리서와는 전혀 다르게 인간의 현실에서 시작해서 하느님께로 전개되는 것처럼 본격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참 생명으로 초대한다.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으로 상징되는 사랑은 감각적인 달콤함은 있으나 아름다운 장미 꽃다발처럼 뿌리가 없기에 언제나 시들고 말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은 영원해야 하고 영원한 사랑을 위해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한다고 제시한다.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나무의 상징은 생명인데,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너무 흡족하셔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시고 거기에 생명의 나무를 심으셨다는 기록이 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인간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느님께서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창세기 2, 8-9)
젊음은 생명의 가장 이상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여기에 현혹되다 보면 젊음이 사라지는 날 허전한 감회에 빠지고 말 것이니, 영원한 생명을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젊음의 발랄한 순간에도 영원에의 그리움을 키우기 위해서는 신앙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초대하고 있다.
이 부분을 통해 작가는 하느님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이 희박한 현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참모습, 즉 우리 가운데 너무 가까이 계시면서도, (Immanent)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많으며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계시는 분”( 1 디모 6, 16)으로서 초월적인(Transcendent) 모습의 하느님, 즉 주의 기도의 서두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로 초대하면서 하느님과 어떤 연관을 가지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은 과거 교회의 가르침처럼 근엄하고 우리를 다스리시고 간섭하시고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초콜릿처럼 달콤한 사랑의 원천이시기에 하느님께 가까이 사는 사람은 천사의 바지 색과 아가씨의 윗옷 색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모됨을 표현하고 있다.
천사의 입김으로 불어 떨어진 분홍빛 심장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아가씨의 손에 들린 책과 같은 갈색으로 변한다. 여기서 작가는 하느님과 초콜릿을 연결시키면서 인생의 참된 기쁨, 달콤함, 만족, 보람 행복과 같은 현대 젊은이들이 그리워하는 가치는 결국 하느님 안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결론으로 인도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하느님은 초콜릿처럼 달콤한 분이시니 두려워 말고 과감히 그분께로 나아가라는 초대이다. 이것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아니고 성서 안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내용이지만 환자의 병세에 맞게 조제된 처방전처럼 하느님을 잊고 발렌타인 데이의 초콜릿 주고받는 것이 사랑의 최고 표현으로 여기며 몰두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바로 그 초콜릿이라는 상징을 통해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으로 인도하고 있다.
“주님의 계명은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 주님의 법은 환하여 눈을 밝혀 주도다. 금보다 순금보다 더 바람직하고 꿀보다 진 꿀 보다 더욱 달도다.” (시편 18, 11)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리다.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
하느님 내 하느님 고에 맞추어 당신을 찬미 하리이다.”(시편 42 , 4)
성당이나 교회가 비어가고 있는 사이에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사람들이 몰리는 현실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성화를 통해 교회 안에서 강론이나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영적 갈망을 체험을 하고 있기에 오늘날 성(聖)미술은 효과적인 회심과 선교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통적인 가치와 너무 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젊은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한데, 작가는 이런 현실에서 대단히 예언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신앙을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