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탄생 예고 (Annuntiation, :1450)
작가 : 프라 안젤리꼬 (Fra. Angelico : 1399- 1455)
크기 : 프레스꼬 ;230×321cm
소재지 : 이태리 피렌체 산 마르꼬 (San Marco) 박물관
하느님은 진선미의 근원이시지만 모든 성미술 작가의 삶이 다 성스럽고 아름답지는 않기에 작품과 작가의 삶은 별개의 것으로 여기는 것이 상식이나 (성화해설 86번 필립보 립피: 숲속의 성모) 이 작가는 자신의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드문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지난 1982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작가를 복자(Beatus)로 선포하셨기에 이후부터 그의 이름은 복자 안젤리꼬(Beato Angelico)가 되었다. 안젤리꼬라는 이름은 그가 속했던 도미니꼬 수도회의 석학 성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칭호를 연상케 하며 항상 천상적인 것에 대한 큰 그리움과 갈망을 승화시키며 살았던 그의 수도적 여정과 예술가의 여정이 일치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작가는 피렌체 근처 피에솔레(Fiesole) 도미니꼬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공동체가 피렌체에 창설되자 여기로 옮겨와 활동을 했다. 피렌체는 당시 양모업으로 대단한 부를 축적하면서 르네상스 예술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에, 지성적인 활동을 강조하던 도미니꼬 수도자들에게는 영향력 행사의 최적인 장소였다.
이런 처지에서 시작된 도미니꼬회의 산 마르코(San Marco) 수도원은 그의 성덕과 매력적인 영향력으로 곧 피렌체의 명소가 되었고, 당시 피렌체의 실세였던 코시모 디 메디치(Cosimo di Medici)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도움에 의해 예술적 관점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수도원으로서의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되었다.
피렌체 공국을 르네상스 운동의 진원지로 부각시키면서 부와 영화의 극치를 누리던 코시모 디 메디치는 지성과 예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더 없이 검박한 탁발 수도자의 삶을 살던 작가와 그 공동체에 매료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도원에 방 하나를 얻어 수도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피정과 기도로 영적 생활에 노력할 만큼 작가와 각별한 인연을 유지했다.
작가가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는 동안 이 수도원은 피렌체의 명소이며 거대한 성미술 전시회장이 되었다. 당시 피렌체를 풍미하던 극단의 사치와 화려한 분위기를 외면하고 작가는 작품 활동을 통해 가난하고 단순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습으로 수도원을 꾸몄다.
이 수도원의 특징은 수도자들의 수방(修房:Cella)마다 작품 한 점씩을 남긴 것인데, 작가는 성서에 나타난 여러 사건 인물들을 묘사하면서도 특징을 부여했다. 오늘날에는 박물관으로 변한 성 마르코 수도원 수도자들의 방은 작고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는 텅빈 공간이나 방마다 작가가 그린 한 점의 성화가 복음적 생기를 창출하고 있다.
이 방에 그려진 성미술 작품은 과거처럼 성서적 사건을 연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도와 묵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전개시켰는데, 이것은 작가가 속한 수도회의 이상인 “너희는 관상하고 그 관상한 바를 남에게 전하라: Contemplatio et tradere!)라는 도미니칸 영성의 바탕에서 나온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머리로 구상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무릎 꿇고 기도한 결실로 그렸기에 그의 작품은 성서적 기억을 일깨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관객이 하느님께로 마음을 올리게 만들었다. 작가가 생전에 자주 표현한 대로 “성미술을 하기 위해선 그리스도를 자주 체험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이 작품을 통해 증거되고 있다.
그의 시복식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작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복자 안젤리꼬는 그가 일생을 통해 그렸던 많은 작품들, 특히 성모님의 생애와 완벽한 통합을 이룬 드문 예술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루가 복음 1장 28절 “기뻐하소서,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하고 말한 내용이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두려워 마시오 마리아!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아셨습니다. 두고 보시오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입니다.” (루카 1: 30-32)
마리아의 모습은 처녀의 모습이며 나자렛이란 시골 출신의 꾸밈없는 단순한 모습이다. 그의 표정은 처녀의 몸으로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 앞에 당황했으나 이것이 하느님의 뜻인 줄 알았을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루카 1: 37)라는 인간적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인 인간이 보일 수 있는 극단의 신뢰와 평화의 모습이다. 이 극적인 순간의 마리아의 표정은 더 없이 평온스럽다.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당황하는 것을 보고 천사는 “두려워 마시오 마리아! 당신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시오.”(루가 1: 31)의 말씀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인간의 평온함이다.
두려움이 없어 평온한게 아니라 두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했을 때의 평온함이며 이것이 바로 크리스챤이 지녀야 할 평온함이다. 크리스챤이 된다는 것은 여느 인간들이 져야 할 어려움이나 두려움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크리스챤으로서의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서 더 큰 십자가를 져야 하는 법이나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에 자신을 맡겼기에 평온할 수 있음을 마리아는 보이고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자기 삶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크리스챤 모델의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 신학에 있어 천사의 의미는 많이 축소되었으나, 신구약 성경에는 분명히 천사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으며 구약에서의 천사가 하느님과 그 백성의 중개 역할이었다면 신약의 천사는 악마에 대항하여 하느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인간을 돕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다. 외적으로 볼 때 그들은 인간 남자 청년의 모습이며 흰옷이나 혹은 눈부신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이 작품 외에도 같은 주제로 여러 작품을 남겼고 산 마르코 수도원 안에도 천사와 성모님 외에 천사의 뒤를 성 도미니꼬가 지키고 있는 다른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은 작가의 마지막 작품이면서 그동안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모든 것을 더 없이 잘 정리해서 정갈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작가가 활동하던 시대는 단테의 영향으로 천사에 대한 표현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다루게 되었다. 천사들은 깃털이 있는 화려한 날개, 빛나는 아름다운 옷,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면서 천상을 향한 선남선녀들의 길을 인도하고 하느님의 뜻을 알리는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루카 복음에서 마리아를 찾아온 천사는 가브리엘이며 대천사로서 히브리 말로 “하느님은 강하신 분이시다”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심부름꾼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주제를 작품으로 남긴 많은 작가들은 성모님과 천사의 자세를 명령권자와 명령권자에게 복종하는 모습, 즉 천사는 서있고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로 표현했고 작가 역시 다른 작품에선 그런 모습으로 그렸으나 여기에선 서로 무릎을 꿇은 예외적인 자세인데, 이것은 대단히 예언적인 표현이며 의미있는 것이다.
인간이나 천사나 다 하느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느님의 명령을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수평적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선물인 천사의 신성(神性)을, 천사는 마리아의 인성(人性)을 통해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시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가 과거의 수직적인 관계와 다른 수평적인 관계로 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탁발 영성의 결과였다. 즉 프란치스코회와 함께 시작된 도미니코회 역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크리스챤들은 다 주님 안에 형제, 자매임을 강조했기에 작가 역시 이 작품 속에서 이런 면을 표현하게 되었다.
봉건사회의 영향으로 교회 영성 역시 주종관계의 수직성 강조에 머물던 중세는 탁발 수도회의 출현으로 복음적 가난과 형제성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이런 면에서 이 작품은 탁발 수도회가 강조하던 형제적 영성의 핵심을 천사와 마리아의 자세를 통해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천사의 손과 마리아의 손은 같은 모양으로 가슴에 포개고 있다. 가슴에 손을 포개는 자세는 상대방의 요구를 아무 조건없이 극단의 신뢰로 받아들이겠다는 약속의 상징인데, 천사와 마리아는 꼭 같은 자세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뜻을 향해 열려 있는 일치와 신뢰의 상징이다. 둘 다 상대방의 신성함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자세는 하느님의 뜻 앞에 보여야 할 크리스챤의 기본이면서도 완성된 자세이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전갈을 받으면서 마리아가 보이신 믿음의 극치로 표현된 순종의 태도 “저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 38)로 표현된 동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전에 몇 개의 동일한 주제를 작품화 했는데, 갈수록 작품의 배경이 축소되고 구도 역시 단순하게 되었다. 작가의 대부분 작품이 다 그렇듯 작품 특징은 화려함이나 군덕지가 배제된 담백함에 있으며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작가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너무 기름지고 양념이 많이 든 음식과 같이 어떤 때 지나친 과장법으로 표현된 르네상스의 작품들과 달리 작가의 작품은 너무 담백하기에 실증이나 거부감이 오지 않으며 오히려 볼수록 더 깊이 빨려 들면서 친근감을 느끼게 만든다.
작가는 일생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작품으로 남긴다는 마음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나 특히 이 작품은 작가의 삶의 모든 것이 요약된 대표작이다.
“르네상스 예술가 전기”를 쓴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는 작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는 기도를 먼저 하지 않고 붓을 드는 일이 없었으며, 그림을 그리면서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계속 눈물을 흘렸으며, 한번 그린 것을 다시 지우고 그리는 법이 없이 한번으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의 삶은 우리나라 불교 예술에서 만날 수 있는 지극정성의 태도, 즉 글씨 한자를 쓰기 위해 많은 기도를 했던 일자천배(一字千拜)의 태도나, 깊은 선정(禪定)체험 후 큰 붓놀림 한번으로 작품을 완성하던 화승(畵僧)들을 연상시킨다.
작가는 자기 작품을 통해 “복음적 진리는 교의(Dogma)로 표현되는 것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이라는 사실을 힘있게 증거하면서 지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신학이 표현하기 어려운 복음적 진리를 감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로 표현했다.
신학은 교회의 신앙을 보존하고 전하기 위해 많은 교의를 창출했으나 아쉬움이라면 교의 내용이 복잡해지면서 어떤 때 하느님의 모습 이해에 혼란스러움이 될 수 있었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복음은 단순하고 명료한 것임을 적절히 표현했다.
작가가 이 작품을 위시해서 성 마르코 수도원 수방(修房)에 남긴 작품들은 영적 삶의 풍요로움이 얼마나 매력적인 지를 알려주고 있다.
오늘날 박물관으로 변한 수도원 이층은 작가가 원장으로 있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두 평이 됨직한 작은 방에 들어가면 조그만 창문 하나 외에 아무 것도 없는 방이며 한쪽 벽에 작가가 남긴 성화 한 점이 보관되어 있다.
소박한 프레스코 작품이지만 어느 작품에서도 맛볼 수 없는 깊은 종교성을 체험할 수 있기에 어떤 화려한 장식을 한 방 보다 더 큰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다. 풍요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결핍되기 쉽기에 한번은 반드시 체험해야 할 복음적 가난의 기품과 풍요로움과 같다.
이런 방에서 하느님께만 몰두했던 수도자들은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희생과 극기의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풍요체험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부요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진정한 자유인이요 멋쟁이들이라 볼 수 있다. 필립비서에 나오는 사도 바울로의 쓰레기 체험과 같다.
그러기에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처지로 부와 사치의 극치를 살다보니 남자들은 하나같이 통풍환자가 되어야 했던 메디치 집안의 멋쟁이 코시모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나 보다.
몇년전 성지순례중 우피치 미술관에서 10유로에 사온 그림도 이 그림과 같은데ㅎㅎ
오늘 본 그림은 성모님 무릎에 성경책도 있었구요 새도 있었구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그림도 있었어요~
같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그림 이었네요
그림의 ㄱ 자도 모르지만 재미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구약에서...기억이 잘 안나지만요.
하느님은 단순하게 만드셨는데 인간들이 복잡하게 만든다라는 내용의
성경구절이 살면서 자주 떠오르는데 어느 구절인지 적어두질 못했어요.
감사히 잘 읽으며 옮겨가지요.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