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당신이
사람들에 의해 죽게 될 것이라고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그러나 이 수난 예고가 무슨 뜻인지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이 말의 뜻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루카복음은 풀이합니다.
그런데 말의 뜻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그 말의 뜻을 적극적으로 감추셨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주님께서는 감추지 않으셨는데도 감추어졌다는 뜻입니까?
주님께서는 감추지 않고 명백하게 말씀하셨고,
이번이 첫 번이 아니라 두 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감추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이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왜?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보면
이해를 못하는 이유가 그 말의 뜻이 너무 어려워서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신이 살해당할 거라는, 우리도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해를 못하는 것은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 말씀처럼 되리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기 때문이고,
그 말씀처럼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청천 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이 있지요.
정기적인 건강 검진을 하러 병원에 갔다 오더니 어머니가 암이라는 겁니다.
전에 아무런 예후도 없었고 어디 아프다고 한 적이 없었기에
남편이나 자식 모두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토록 받아들이기 싫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해 못합니다.
자기가 의도하지 않은 하느님의 뜻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예상하지 못한 하느님의 계획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아파오던 사람이 죽을 거라고 하면 그 말에 수긍을 하고,
살만큼 산 사람이 죽을 거라고 해도 그 말에 수긍을 하고,
나쁜 짓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죽으면 벼락 맞아 죽은 거라고 수긍합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수긍하기 힘든데 오늘 복음 바로 앞에서 벌어진 일들이
제자들로 하여금 더더욱 수긍할 수 없게 합니다.
타볼산의 그 놀라운 변모를 제자들이 보았고,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시자 사람들이 능력의 주님께 찬탄을 합니다.
이렇게 인기가 좋은 주님이 사람들의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고,
죽임을 당할 거라는 것은 더더욱 수긍할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자기들을 위해서 더더욱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람에 의해 죽임 당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느님이시고 인간을 구원할 구원자가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일까 루카복음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조롱을 소개 합니다.
“이 사람이 남들을 살렸으니
정말 하느님께서 택하신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살려보라지!”
고난 받는 구원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바오로 사도 말대로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일 뿐,
도저히 납득할 수도, 수긍할 수도 없는,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십자가,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리스도교인인가?
아니면, 비위에 거슬려하는 유다인 또는 어리석게만 여기는 이방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