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보좌 신부로 갔던 본당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저희 선교사 형제들이 땅을 사고 거기에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웃에 가난한 가족이 살고 있어서 땅 한 귀퉁이에 집짓고 살게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곳에 갔을 때 그렇게 한 동안 살던 이 사람들이
그 땅의 소유권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도 아닌 사람들을 가난하다는 것 때문에 그냥 살게 해 줬는데
선교사 형제들이 한국 법을 잘 모르는 것을 이용하고,
선교사들의 순수한 사랑을 악용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감는 격이었지요.
저는 보좌 신부였기에 얼마 있다가 그곳을 떠났고
그래서 그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때의 저는 오늘 복음이 생각나면서
저도 하느님께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일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의 포도밭을 저도 모르게 제 것으로 삼는 적이 많은지,
그 순간에는 모르다가 아차! 하고 뒤늦게 깨닫는 적이 많습니다.
북한 평양에 평화 봉사소를 세울 때의 얘깁니다.
몇 년 간의 줄다리기 끝에, 요즘말로 하면 오랜 ‘밀당’ 끝에
북측에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즉시 수도원 경당으로 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게 감사의 기도를 한참 뜨겁게 드리고 있는데
문득 제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일을 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 일은 제 일이 아니고 하느님의 일인데
마치 제 일을 제 뜻대로 이룰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주셨다는 거였지요.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께서 이루신 것이고 저는 다만 도구였을 뿐인데
하느님의 그 중요한 일에 나를 도구로 써주셨음에 대해 감사드린 게 아니라
그 일이 제 뜻대로, 제 바람대로 성사시켜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린 겁니다.
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보다도 더 큰 잘못이 사람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것인데
저는 사람을 하느님의 사람이 아니라 제 사람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 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어떤 때는 그 사람이 나의 뜻대로 할 것을 요구하며,
요구한 대로 안 될 경우에는 무슨 권리가 있는 양 못마땅해 하기도 합니다.
너무도 흔히 하는 저의 잘못이 바로 누가 내 마음에 들기를 바라는 겁니다.
부모에게 자식조차도 자기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유인데
저는 부모도 아니면서 사람들을 마치 제 것인 양 소유하려고 드는 겁니다.
프란치스코의 제자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저입니다.
언젠가 프란치스코가 형제 하나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점심이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 길가 포도밭에서 포도를 따 먹었고,
같이 걷던 형제는 도망을 잘 쳤지만 일부러 붙잡혔을까
프란치스코는 주인에게 붙잡혀 실컷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길을 가는 내내 두들겨 맞은 것을 즐거워하며
“형제는 잘 먹었고, 프란치스코는 잘 얻어맞았네.” 하며 가난을 희롱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진정 아무 것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포도밭의 포도도 하느님의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것 따먹는 게지 남의 것을 따먹는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니 두들겨 맞아 줄 뿐입니다.
남의 것만 그러면 남의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인, 상 도둑의 짓이겠지만
그는 아무 것도 진정 자기의 것이 아니기에 더 필요한 사람이 나타나면
수도원에 하나밖에 없는 성서마저도 줘버리고 맙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느님의 것을 가로채는 도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부익부빈익빈의 이 자본주의 시대,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사람을 함부로 다루는 이 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교황이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이름으로 삼은 이유입니다.
교황은 세상에 대해서만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도 하느님의 포도밭을 잘 돌보라고 합니다.
진정 사람이건 사물이건 자기 것 삼지 말고 하느님 뜻대로 돌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 곁에 하느님으로 같이 있어주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교황은 오늘 주님 말씀대로 소작의 자리를 빼앗습니다.
목자에게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너무 사치스러우니
그런 목자는 주교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내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잘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로 저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오늘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