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라.”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신 주님께서
이제 방향을 돌려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카복음은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 대한 꾸짖음과
제자들에게 대한 말씀 사이에 “그러는 동안에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다.”는 조금은 어색한 상황 설명을 집어넣습니다.
이것은 아마 이렇게 사람이 모여들 때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인기를 끌기 위해 위선을 하지 말고,
외려 이런 상황을 복음 선포의 기회로 이용하라는 말을 하기 위함일 겁니다.
언젠가 어떤 분으로부터 이런 좋은 글을 문자로 받았습니다.
“부처님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았고
수천 대중과 함께 있어도 귀찮아하지 않았습니다.
숲에 홀로 있으면 정진하기 좋았고
시끄러운 저자에 있으면 교화하기 좋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으면 수행하기 좋았고
먹을 것이 많으면 베풀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사람들이 비난하면 인욕행을 하기 좋았고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하고 따르면 법을 전하기 좋았습니다.
부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좌우되지 않고,
오직 복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먼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이러하라고 하십니다.
곧, 보통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과장하거나 위선하지 말라고 하시고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는 조심은 하되 두려워하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특히 지도자들과의 관계에서는 조심과 두려움을 같이 권고하십니다.
우리말에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말이 있는데
지도자들을 마치 이런 똥과 같이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렇게 자유로우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하느님 앞에 서야만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제자들을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으로 부르심은 단지 친밀함의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의 벗답게 하느님의 사람이 되라는 격려의 말씀이고,
어쩌면 벗답게 처신하라는 부담스러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그렇고 우리도
주님의 벗이며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무엇보다 뚜렷하고 확고하게 가져야 할 것이며,
다음으로 이러한 확고한 정체성을 가짐으로써
진정 사람들에게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람들은 우리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복음 선포의 대상일 뿐임을
마음에 다시 한 번 새기는 오늘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