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아기 어머니와 그 아들 (Die Kniende Mutter und ihr Sohn:1907)
작가 : 파울라 멘델르손 베커 (Paola Mendersohn Becker :1876- 1908)
크기 : 켄버스 유채 : 82X 124,7cm
소재지 :독일 브레멘(Bremen) 루드빅 로셀리우스 미술관
성모님은 이 세상 여인 중에 가장 많이 미술과 음악의 주제가 되신 여인이다
성모님은 처녀성과 모성이라는 여성의 양면을 공유하시면서 하느님의 모습을 드러내시기에 역사 안에서 작가들은 여러 방법으로 성모님의 진면모를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런데 현대에 오면서 많은 작가들이 하늘의 여왕으로서 , 하느님의 어머니로서 성모님 이전 인간 예수의 어머니 성모님에서 출발해서 모성 안에 있는 하느님을 찾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안정된 배경의 가정에서 출생해서 예나 오늘이나 이런 가정 분위기에서 눈뜨기 쉬운 아름다움의 표현 수단으로 예술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처음 자연 풍경화에서 인물화로 작품 경향이 바뀌면서 더 진실하고 깊은 인간 삶의 실상 표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자연과 인간은 하느님의 작품이란 면에서 공통점을 지니기에 작가는 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걸작의 의미성을 발견할 수 있었기에 작품에 이 점을 새기고자 노력했다.
"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창세기 1: 31)
1906년 예술의 도시 파리 여행은 그에게 예술혼을 불태우게 만들었고 , 당시 명성을 떨치던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과 폴 세쟌느의 작품을 만나면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이후부터 그는 "어머니와 아기"라는 주제에 대단히 집념으로 몰두하게 되었으며 이 작품은 작가 생애의 마지막 작품이면서 ,작가의 혼신을 다한 열정이 여과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와 아기"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며 순수한 관계인데 , 작가는 이 주제를 향해 단순하면서도 심원한 표현을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작가가 초기에 몰두했던 아프리카를 연상시키는 생기있는 자연의 배경이며 에덴 동산을 연상시킨다.
그 앞에 원주민으로 보이는 건강하다 못해 강건하게 보이는 여인이 뚫어지듯 팔에 안은 자기 아기를 바라보고 있다.
"여성은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라는 말대로 이 여인은 원주민 여성들에게 볼 수 있는 순수하면서도 강한 생명과 힘의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이 여인은 팔에 안은 아기의 보호자라는 면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 여인의 유일한 관심은 팔에 안은 아기인 듯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머니라는 단어의 가장 순수하면서도 정확한 모습이다
성서에서 어머니는 하느님의 생명을 전달하는 도구로서 인간 삶 전체와 구원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머니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며 ,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관계 안에 묶이는 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으로 인간을 초대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 어머니 마리아와의 사랑은 모자의 혈육에 묶어두지 않고 당신 제자인 요한에게 맡김으로 모든 크리스챤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다.(요한 19: 26- 27)
아담이 자기 아내를 하와라고 부른 것은 그녀가 "생명 있는 자들의 어머니"(창세기 3, 20)가 되었음이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여자의 마음에 어머니가 되고픈 강한 열망을 주셨고 , 하느님께선 이 열망을 어여삐 여기시어, 어떤 때 불임의 처지에 있는 여인에게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선사하셨다.(1 사무엘 1: 2-5)
여성으로서 어머니가 된 것은 자기 삶에서 더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원천이 된다.
하와가 첫 아들을 낳았을 때 "내가 주님의 도움으로 남자 아기를 얻었구나"(창세기 4: 1)하며 환희에 넘쳤고 , 성서에 "이사악" 이란 이름은 그의 어머니 사라가 아들을 낳은 후 너무 기뻐 웃었다는 뜻에서 유래하는 것이다.(창세기 21: 6)
성서에서는 예루살렘을 "어머니의 도시"로 부르고 있는데, 하느님의 배성이 이 도시 안에서 보호를 받으면 살고 있다는 표시이다.
크리스챤들은 이런 하느님의 모성에 참여하면서 고통 중에 기도하고 고통 저편에 있는 희망을 확인하며 살아가기에 모성은 크리스챤 신앙의 배꼽이라 볼 수 있다.
성서는 이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쌓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큰 근심에 싸여 있다."
이런 면에서 이 어머니는 바로 인간에 대한 극단의 사랑을 표현하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성서에서는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사랑하듯이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은유적 표현이 수없이 드러나고 있다.
하와로부터 시작되어 마리아에게서 완성된 모성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작가는 성서에서 출발하는 것과 전혀 다른 하느님의 작품인 자연과 인간의 접근으로 표현했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어머니와 아들" 이라는 인간 삶의 가장 순수하고 긴밀한 관계를 통해 가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관람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작가에 있어 아기를 키우는 모든 어머니는 바로 성모님의 모성에 참여하면서 아무 조건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에 보이는 선교사임을 알리고 있다.
어머니의 보호와 사랑속에서 아기는 더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젖을 먹고 있다.
젖이란 아기의 생명을 키우는 유일한 음식이며 유목민의 삶을 살아던 이스라엘 인들에게는 대단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젖이라는 것은 아무런 수고 없이 주어지는 가장 맛있고 영양가 높은 음식이었기에 하느님 선물의 상징이었으며 그러기에 이 어린이는 하느님의 보호속에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상징이다.
시편작가들은 마치 어머니의 품안에서 젖을 먹고 있는 아기처럼 하느님께 매달리며 살기를 권고하고 있다.
'차라리 이 마음은 고스란히 가라앉아 어미 품에 안겨 있는 어린이인 듯
내 영혼은 젖 떨어진 아기와 같나이다. "(시편 131: 2- 3)
수유기의 아기를 둔 여느 어머니 처럼 아기가 먹고 있는 젖은 훌쭉해 있으나
다른 쪽의 젖은 더 없이 풍만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풍만한 젖가슴은 인간 사랑의 최고 경지인 모성의 상징이며 이 여인은 자기 분신인 아기에게 언제나 사랑을 줄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성서에서 젖이 넘쳐 흐른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들에게 내리는 축복과 약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성서는 이스라엘인들이 장차 들어가려는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자주 표현하고 있다. (출애 3: 8)
이 여인의 젖가슴은 사랑의 젖을 풍부히 담아 팽팽하여 아기가 배고프고 목마른 순간에 언제라도 허기와 갈증을 풀어 줄 생명수의 탱크 처럼 언제나 준비된 상태이다..
젖은 인간들의 삶에서 최고 사랑의 선물이며 표현이 되기에 비단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만이 아니라 더 없이 강렬한 남녀 사랑의 상징도 된다.
"나의 신부여, 그대의 입술은 생청을 흘리고 그대의 혀 밑엔 꿀과 젖이 있다오."(아가 4: 11)
대단한 관능적인 냄새까지 풍기는 이 표현 역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순수하고 열렬한 사랑의 표현이듯 젖으로 충만한 여인은 모성의 궁극적 목표인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로는 젖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만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1코 3: 2)
작가는 교회의 성모 공경이 하느님의 어머니 , 하늘의 여왕, 은총이 가득하신 어머니와 같은 너무 천상적 차원과 깨끗한 동정녀의 모습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소홀히 다루어 질 수 있었던 인간 모성을 통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너무도 단순하고 쉬우면서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인간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모습이 뒤로 가려지면서 성모님이 공경과 전구의 대상으로 강조되는 현실에서 모성의 접근을 통해 성모님은 단순한 전구나 공경의 대상이 아닌 본받음의 대상이며 , 이미 어머니의 모습 안에 너무 강하게 내재하고 있는 성모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긍지를 느끼게 만들고 있다.
작가는 짧은 생애를 불꽃 처럼 살면서 자연과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정점의 상태에서 인간 삶의 가장 순수한 모습을 바로 아기를 젖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찾았다.
예술 활동에 몰두하노라 작가는 아기를 가지지 못하다가 이때부터 작가는 아기를 가진 어머니가 되고픈 강한 열망을 느끼게 되고 , 이 꿈이 실현되어 아기를 낳았으나 그 산후에 얻은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어머니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서 주님 말씀하신 " 한알의 썩는 밀알"의 삶을 자신의 죽음을 통해 표현했다.
한마디로 세상에 자기 분신인 생명을 남기고 죽음으로 들어감으로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바친 예수님의 t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재현했다.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해 빠리에 머무는 동안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독일어 문화권에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되던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Rainer Maria Rilke: 1875- 1926)만나게 되었다.
서로가 시와 그림이라는 다른 분야이긴 해도 인간의 순수함을 표현하기 위해 생애를 불태우는 공통점이 있었기에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지게 되고 깊히 사귀면서 서로의 작품성에 도움을 주는 처지가 되었다.
릴케는 인생의 가장 고귀한 모습은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임을 발견하고 , 자기가 어머니가 된 순간 세상을 떠나야 했던 작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친구에게 영원한 안식을 " 이라는 시를 남겼다.
전통적인 성화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이 작품에서 성모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황당한 일이고 , 더 나아가서 신성 모독의 감성도 느낄지 모른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과거와 전혀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전위작가로서 세계적 명성을 떨친 백남준 선생은 현대 미술이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는 "새로움"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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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많은 현대 작가들은 과거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새로움에의 접근을 생명처럼 여기고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을 바라보면 우리 눈에 익숙한 전통적 성모화와 또 다른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새로움의 관점에서 전통적인 성모화에서 가려진 부분을 너무도 선명히 제시해서
하느님의 작품으로서 사랑받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의 순수하고 단순함, 인간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역할을 맡으신 성모님의 모습을 통해 모든 여인이 선택하고 있는 모성의 고귀함을 신앙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주고 있다.
몇 년 전엔 본당 수녀님의 성경공부를 무척 행복하게 했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 신청해서 시작했지요.
매일 십분씩 시편을 읽으라고 권하셔서 실천하고 있는데
몇 년 걸릴거라고 말씀하셨어요.
항구하게 할 수 있기를 바랬어요.
봄감기 조심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