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후 목요일
언제나 고수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중국 영화를 보더라도, 고수는 첨부터 의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하수들은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수들이 자신의 작은 재주가지고 의시대고 다른 사람위에 굴림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결국 그 고수를 알아보는 것은 또 다른 고수이다. 고수는 서로 부딪혀 싸우기 전에 그의 가치를 알아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이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세례자 요한의 투옥으로부터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리고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요한과 예수님의 대비를 통해 그의 모든 작업을 예수님께 이양하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첫 시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 비슷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그 공생활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태오 복음에서처럼, 요한이 잡힌 후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가 있는 가파르나움에서 그 회개의 선포가 시작 되었다고 그 시간과 장소를 명확하게 언급하기 보다, 요한의 투옥을 이야기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그 이후 족보를 언급하면서 ‘서른살 가량되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광야의 유혹을 말한 후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 신 후 나자렛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정확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시간적, 공간적인 것으로 서술하기 보다, 그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무슨 힘으로 시작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라고 언급하며 그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이 기도와 성령에 대해 다른 복음보다 더 많이 언급하고 예수님 생애에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자렛 회다에서도,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의 복음선포의 시작을 알리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선포는 하느님의 영, 성령의 힘에 이끌려 이루어지고 그 영의 활동으로 루카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란 나자렛에서는 오늘 복음 바로 이어서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가지며,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령의 능력을 보기보다, 육신의 눈으로 그 인간적인 모습만을 보았기에 예수님의 더 큰 능력을 만나고 있지 못함을 보게됩니다.
주님의 성탄과 공현 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분을 알아보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마치 하수들이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그분의 공현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안에 있는 그분의 성령이심을 다시금 되새겨야겠습니다. 사부님의 첫 번째 권고에서 그분을 알아뵈옵는 방법을 이야기 하시면서,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영신의 눈으로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언제나 고수는 잘 드러나지 않는 법이다. 중국 영화를 보더라도, 고수는 첨부터 의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하수들은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수들이 자신의 작은 재주가지고 의시대고 다른 사람위에 굴림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결국 그 고수를 알아보는 것은 또 다른 고수이다. 고수는 서로 부딪혀 싸우기 전에 그의 가치를 알아봅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이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세례자 요한의 투옥으로부터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다면, 그리고 요한 복음은 공관 복음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예수님의 공생활을 세례자 요한의 증언과 요한과 예수님의 대비를 통해 그의 모든 작업을 예수님께 이양하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늘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첫 시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공관복음과 비슷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그 공생활 시작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마태오 복음에서처럼, 요한이 잡힌 후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가 있는 가파르나움에서 그 회개의 선포가 시작 되었다고 그 시간과 장소를 명확하게 언급하기 보다, 요한의 투옥을 이야기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으며, 그 이후 족보를 언급하면서 ‘서른살 가량되어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광야의 유혹을 말한 후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 신 후 나자렛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정확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시간적, 공간적인 것으로 서술하기 보다, 그 시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무슨 힘으로 시작되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라고 언급하며 그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이 기도와 성령에 대해 다른 복음보다 더 많이 언급하고 예수님 생애에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나자렛 회다에서도,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어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언급하시면서 예수님의 복음선포의 시작을 알리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선포는 하느님의 영, 성령의 힘에 이끌려 이루어지고 그 영의 활동으로 루카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란 나자렛에서는 오늘 복음 바로 이어서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가지며,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성령의 능력을 보기보다, 육신의 눈으로 그 인간적인 모습만을 보았기에 예수님의 더 큰 능력을 만나고 있지 못함을 보게됩니다.
주님의 성탄과 공현 시기를 보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지만,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그분을 알아보는 이들이 드물다는 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마치 하수들이 고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 그분의 공현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안에 있는 그분의 성령이심을 다시금 되새겨야겠습니다. 사부님의 첫 번째 권고에서 그분을 알아뵈옵는 방법을 이야기 하시면서,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의 육신만을 보았지만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영신의 눈으로 알아보고 맞이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