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아홉 나병환자는 병의 치유가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이의 치유는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치유가 구원으로 이어졌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만 가지고
눈먼 이가 구원까지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병의 치유만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다음 말씀을 보면
눈의 치유가 영혼의 구원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지난 주 아홉 나환자는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않았고,
주님께 감사드리려고 돌아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눈먼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찬양>과 <주님을 따름>, 이것이 구원의 표시입니다.
이 눈먼 이도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의 병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의 이런 상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태생 소경이 아니라
볼 수 있다가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얼마나 그 고통이 컸겠습니까?
예를 들어, 잘 살다가 가난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게 산 사람보다 그 가난이 훨씬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그렇게 된 처지가 불행하게 느껴지겠지요.
우리는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왜 내게 이런 일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왜 이런 일이 내게 생겼는지 이유를 알고파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안 좋은 일이?’나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이?’와 같이 거부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믿음이 크게 흔들리면서
‘내게 왜 이런 고통을?’하며 하느님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고통에서 고통밖에 보지 못하던 사람이
고통 때문에 그리고 고통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더 완전한 구원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정도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한 번 찬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느님과의 영원한 일치, 합일을 갈망하게 되는 것이고,
이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 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눈이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사실, 이 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눈을 떴어도,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눈을 뜬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이제 그에게는 가야할 길이 명확해졌습니다.
이 길을 가야할까 저 길을 가야할까 암중모색하지 않고,
이제는 밝은 길을 주저함 없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눈먼 이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잘 보이는 눈으로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여지저기 잘도 놀러 다녔는데
그 눈이 멀어 고통스러웠던 겁니다.
그러다 오히려 눈이 잘 보였을 때 볼 수 없던 하느님의 길을
눈이 멀고 난 뒤 고통 속에서 찾게 된 것이고
새로운 눈, 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고통이란 이런 개안 수술의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도 못 볼 것을 보던 눈이 봐야 할 것을 보는 눈으로 바뀌는
이런 개안과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머리 모양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에만 온 신경이 가있어 머리만 보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마음이 다른 것에 가 있으면 눈을 떴어도 그 외에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마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 눈을 떴어도 참으로 눈을 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알아 듣습니다. 참으로 본다고 하는 것은,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기 위해 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눈이 볼 수 있게 되었다면 사실, 이 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눈을 떴어도,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눈을 뜬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려고 하지 말고.
"와서 보시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봐야 할 것을 보려는 눈 밝음의 지혜와 용기를 청하는 하루이기를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