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신앙과 관련하여 <믿음>, <불신>, <의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불신과 의심은 비슷하면서도 그 결이 조금은 다른듯합니다.
믿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불신이 완전히 믿지 못하는 거라면
의심은 반신반의半信半疑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완전히 믿는 것도, 완전히 믿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즈카르야와 마리아가 보인 태도에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어떤 차이가 있었기에 마리아는 축복과 칭찬을 받고
즈카르야는 말문이 막히는 벌을 받았어야만 했는지
이런 의문이 드는데, 이런 의문이 저만 갖는 의문일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무런 의문도 들지 않습니까?
복음을 보면 즈카르야와 마리아 둘 다 의문을 가졌고,
그래서 이렇게 각자 질문합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마리아의 의문에 비해 즈카르야의 의문이 뭐가 특히 잘못되었을까요?
제 눈에는 질문 자체만으로 차이를 알 수 없지만 결과를 놓고 볼 때
마리아는 믿음의 질문을 하고 있는데 반해
즈카르야는 의심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마리아는 지금은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이해할 수 있도록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없느냐는 질문인데 반해
즈카르야는 천사의 말대로 될까 의심을 하며
믿을 수 있도록 징표를 보이라는 요구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복음 다른 곳에서 표징을 요구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라고 나무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왜 이들이 악하고 절개가 없다고 하시는가요?
제 생각에 그것은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믿게 하라고 하기 때문이고,
적어도 의심을 그대로 놔두고 믿게 하라고 떼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느님 앞에서도 교만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느님께서는 이런 교만한 사람의 말문은 막으시고
그래서 즈카르야의 말문도 막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불가능 때문에 하느님의 가능을 의심하는 사람,
자신의 믿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며 뉘우치기보다
오히려 불신과 부정을 토해내는 사람의 말문은 막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좋아하실 어떤 일을 하자고 하면
이런 사람의 입에서는 당장 “안 돼”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 생각에 이런 사람의 말문도 즈카르야처럼 막혀야 합니다.
언제까지?
겸손이 믿음을 고백할 때까지이고,
믿음이 가능을 얘기하고, 긍정을 유포할 수 있을 때까지이고,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목청껏 찬미할 때까지입니다.
오늘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것을 보면
열 달의 벙어리 기간 동안 불신의 입과 부정의 혀가 정화되고,
겸손과 믿음으로 입과 혀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었나 봅니다.
오늘 우리도 즈카르야를 거울삼아 보면서 우리 사전에서
“싫어”라는 말과 함께 “안 돼”라는 말도 퇴출돼야 합니다.
문득 투사현상이란 말이 떠오릅니다.
모든 관점은 자기 투사란 말처럼 마리아도 즈카리아도 자기 투사를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바꾸고, 자기 마음을 바꾸는 것이 곧 회개, 회심이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
또한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것처럼 즈카리야가 말을 못하는 상태는
육신은 살아있지만 영혼이 죽은 상태이고 겸손과 믿음으로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회심이 있었기에 다시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즈카르야의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 것을 보면
열 달의 벙어리 기간 동안 불신의 입과 부정의 혀가 정화되고,
겸손과 믿음으로 입과 혀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게 되"는 것 처럼
부정의 언어를 긍정의 언어로 바꾸는 회심을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새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