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하느님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오늘 요한의 편지는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게 되었습니다.
왜 죄를 지으면 하느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을까요?
그런데 정말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일까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우선 탁 떠오르는 것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다음입니다.
죄를 지은 두 사람은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 옷으로 가리고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자신의 죄를 보이지 않으려고 옷으로 포장과 가장을 하고,
더 나아가 숨기까지 하지만 자기만 하느님을 보지 못하지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다 보고 계십니다.
이는 마치 사람에게 쫓기는 꿩이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자
머리만 처박는 꼴과 비슷한 형국이지요.
우리가 어렸을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처음으로 죄라는 것을 짓고 난 뒤 두려움에
집을 나가 밤늦도록 집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범죄의 심리학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만 보고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자기를 보느라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자기의 죄를 보고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만 보고 하느님을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죄입니다.
처음의 죄는 죄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죄이지만
두 번째 죄는 죄 때문에 하느님을 보지 않는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보지 못하게 하는 죄보다 보지 않는 죄가 더 크지요.
돈을 훔친 것 때문에 부모를 피해 집을 나왔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집에 들어가 부모님을 뵈어야 하지요.
그런데 끝까지 집에 들어가지도 부모님을 뵙지도 않는다면
돈을 훔친 첫 번째 죄보다 이 죄가 더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작은 죄가 더 큰 죄를 낳는 것이고,
죄를 감추려는 죄가 하느님을 외면하는 죄를 낳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연쇄성이 있습니다.
아니, 죄에는 연쇄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증화도 있습니다.
돈에 욕심이 나서 돈을 훔치는 죄를 짓고,
돈을 훔친 죄 때문에 하느님으로부터 숨는 죄를 짓고,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숨기려다가 하느님을 외면하는 죄를 짓고,
하느님을 외면하고 살다보니 하느님을 완전히 잊고 사는 죄를 짓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외면하고 완전히 잊은 채 세속에 빠져 살다보면
하느님이 기억에서 사라질 뿐 아니라 우리의 하느님 감각,
영적인 감각도 무뎌지고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찾지도 않게 됩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성에서 하느님이 사라져 버릴 뿐 아니라
하느님을 찾으려는 의지도 우리 안에서 사라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뵙지도 알지도 못하게 되고,
하느님을 뵈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연쇄성과 중증화를 끊는 것이 회개입니다.
병이 깊어져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때까지 가기 전에 수술을 해야 하듯
우리도 그 어느 지점에서건 이 죄의 연쇄성을 끊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죄의 중증화를 막고 영적인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