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랑이 멀어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하신 예수님을 잊어먹게 되었다는 말이고,
이는 반대로 우리 교회가
가난하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한 이웃들도 외면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무관심은
우리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간다.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아파트 문화생활 가운데서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오늘 마귀는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예수가 누구신지 명확히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아무런 관심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나와 예수님과는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면서
베드로의 사양을 질책하시면서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그렇다면 발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청하였다.
예수님과 나와 관계가 있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
그 거래는 섬김과 봉사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분의 섬김을 받은 나이기에
나 또한 이웃을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기는 거래가 맺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인 동시에 맏형님이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과의 형제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기에
우리 또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와는 형제성을,
하느님과는 자녀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그분과의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관계성은
같은 동료 인간들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과
같은 피조물인 자연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오늘 마귀가 고백한 대로
우리는 참으로 주님과 묘한 관계에 놓이고 만다.
아무 상관이 없게 될 수도 있다.
비록 우리가 그분에 대한 지식은
마귀 못지 않게 하루하루 늘어간다손치더라도...
굿뉴스 게시판 등에서
우리는 국내외 우리 한국인 본당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형제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형제들을 비난하는 어조의
신보수주의적 사고도 눈에 띈다.
이러한 자세는
마귀의 지식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 뿐
그렇다고해서 주님과 진실한 관계에
우리를 놓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참된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동료 신자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갈라진 형제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짓밟힌 피조물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과 정말로 상관있는 사람이 된다.
이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최대 목표를 이 형제성 회복에 두면 어떨까?
내가 가장 최우선 관심을 가져야 할 회복 대상은 누구인가
오늘 힘있게 되물어보자!!!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랑이 멀어지면 관심도 멀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리라.
우리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하신 예수님을 잊어먹게 되었다는 말이고,
이는 반대로 우리 교회가
가난하신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멀어짐으로써
가난한 이웃들도 외면하였다는 얘기가 된다.
이렇게 무관심은
우리를 최악의 상태로 몰고간다.
이웃이 누구인지조차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아파트 문화생활 가운데서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메말라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오늘 마귀는 예수님께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관계가 없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예수가 누구신지 명확히 알고 있다손치더라도
아무런 관심과 관계가 없다면
이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님과 무슨 관계가 있나?
나와 예수님과는 무슨 상관이 있나?
예수님은 언젠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면서
베드로의 사양을 질책하시면서
그렇다면 너는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된다고 하셨다.
베드로는 그렇다면 발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씻겨달라고 청하였다.
예수님과 나와 관계가 있기 위해서는
그분과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
그 거래는 섬김과 봉사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분의 섬김을 받은 나이기에
나 또한 이웃을 섬김으로써
그분을 섬기는 거래가 맺어지는 관계인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형제가 되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인 동시에 맏형님이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인다는 조건하에서이다.
따라서 우리가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분과의 형제성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이시고
마음에 드는 아들이시기에
우리 또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와는 형제성을,
하느님과는 자녀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그분과의 관계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된 관계성은
같은 동료 인간들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과
같은 피조물인 자연과의 진실하고도 참된 형제성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오늘 마귀가 고백한 대로
우리는 참으로 주님과 묘한 관계에 놓이고 만다.
아무 상관이 없게 될 수도 있다.
비록 우리가 그분에 대한 지식은
마귀 못지 않게 하루하루 늘어간다손치더라도...
굿뉴스 게시판 등에서
우리는 국내외 우리 한국인 본당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형제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개신교 형제들을 비난하는 어조의
신보수주의적 사고도 눈에 띈다.
이러한 자세는
마귀의 지식으로 주님이 누구신지 알 뿐
그렇다고해서 주님과 진실한 관계에
우리를 놓아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참된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동료 신자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갈라진 형제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짓밟힌 피조물들과의 형제성을 회복하는 것,
그래야만 우리는 주님과 정말로 상관있는 사람이 된다.
이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최대 목표를 이 형제성 회복에 두면 어떨까?
내가 가장 최우선 관심을 가져야 할 회복 대상은 누구인가
오늘 힘있게 되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