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오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그러나>라는 말이 눈에 특별히 들어왔습니다.
<그러나>라는 말은 앞의 말을 뒤집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반전反轉인데 반전에는 나쁜 반전도 있고, 좋은 반전도 있지요.
그런데 오늘 씨 뿌리는 비유에서의 반전은 아주 좋은 반전이고,
우리에게 아주 희망을 주는 반전입니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만 있는 것 같지만 좋은 사람도 있다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느님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는 희망의 반전입니다.
사실 우리가 대충 둘러보면 하느님 말씀과 멀리 있거나
하느님 말씀을 근근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천지인 것 같습니다.
우선 하느님 말씀의 씨와 관련하여 길바닥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길바닥은 단단하여 물도 흘려버리고 씨를 아예 거부하는데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기에 씨가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일 것이고,
새가 와서 냉큼 씨를 먹어버릴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마저 무시하는 교만한 사람이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돌밭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돌밭이란 흙이 있기는 하지만 많지 않은 땅이기에,
씨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씨가 깊이 뿌리내릴 수 없기에
싹을 틔우더라도 금세 햇빛에 말라비틀어지거나 바람에 쓰러져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귀가 얕아서 환난과 어려움이 닥치면
그 환난 때문에 주님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하시는 말씀은 듣지 못하고
사람들이나 점쟁이가 하는 허튼소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가시덤불로 덮인 땅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가시덤불을 덮고 사는 것과 같지요.
토양은 좋은데 햇빛을 쬐고 바람을 쐴 공간이 없습니다.
세상걱정, 재물의 유혹, 욕심들이 마음을 차지하고 있어
하느님 말씀을 위한 공간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제대로 뻗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주님의 복음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실망하는 매우
비관적인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아주 희망적인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사실 길바닥 같은 사람 따로 있고
돌밭 같은 사람, 가시덤불을 덮고 사는 사람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그렇게 태어나 그렇게 살다가 죽는 것도 아닙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토양의 사람도
길바닥 같았던 때가 있었고, 돌밭 같았던 때도 있었으며
좋은 토양이지만 지금도 가시덤불이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환난을 통해 교만을 겸손으로 바꾸시고,
고통을 통해 약한 신앙을 단련시키시고 굳건하게 만드시어
우리를 당신 말씀의 훌륭한 마음 밭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우리의 마음 밭에
어느새 잡초처럼 욕심이 자라고 근심걱정이 싹트곤 할 것입니다.
이 잡초를 뽑아내고 말씀의 씨앗이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할 때 하느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서 더 위안과 힘을 얻는 것도 우리 몫입니다.
기도란 입으로 나의 청을 하느님께 아뢰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시련의 때 하느님의 말씀에서 위안과 힘을 얻는 것임을 마음에 새깁시다.
하느님께서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키느냐에 따라 구원이 결정될 수 있도록...
우리가 구원되고 안되고는 우리에게 달려있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공은 이미 우리에게 넘어왔다는 이야기 될 수 있겠습니다.
어느 것 하나 토를 달수 없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배려....
참으로 신기한 하느님이시다는 생각이 절로 나고 역시 사랑은 상대에 대한 끝없는 배려라는 것..
분명한 것은 씨는 문제 없고 씨가 뿌려질 제 마음의 밭을 정성 다하여 가꾸는 것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새아침입니다.
"잡초를 뽑아내고 말씀의 씨앗이 자라게 하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그리고 시련을 당할 때 하느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서 더 위안과 힘을 얻는 것도 우리 몫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