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다.
우리는 보통 무엇이 내 뜻대로 안 될 때 그 이유나 원인을
나의 잘못에서 찾거나 남의 잘못이나 훼방에서 찾곤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나의 잘못이거나 너의 잘못 때문이 맞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겠고,
거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와 기적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말을
개신교 성경에서는 그분을 배척하였다고 번역하고,
영어 성경에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번역하며,
200주년 성경에서는 “그분에게 걸려 넘어졌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고향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알아온 예수님 모습 때문에
예수님의 신적인 면모(진면목)를 보는 데 있어서 걸려 넘어져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쳤거나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여겨 못마땅해 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향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이 말씀을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향사람들을 비난하시는 것으로
알아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이해하시는 말씀일 것입니다.
한 인간 안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
인성 안에서 신성을 보는 것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일인데다가
어렸을 때의 인간적인 모습이 강하게 자리 잡은 고향사람들이
세례 사건 후 바뀐 신적모습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도 한 번 얘기한 적이 있지만
제 초등학교 동창 중에 수녀님이 된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제가 수녀님, 그분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지만
그 동창이 수녀가 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저의 첫 반응은 ‘걔가?’였습니다.
그리고 동창에서 탈각하여 온전히 수녀님으로 바뀌기까지 몇 년이 걸렸지요.
시간이 많이 지나 묘하게도 그분은 글라라 수녀원 원장이 되고,
저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관구장이 되어 수녀원에서 저를 초대하였는데
동창이기에 더 친하다는 얘기를 들을까봐 아예 거리를 두려고 하였고,
그래서 글라라 수녀님들을 위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도 회피하였지요.
그렇게 한 2년이 지난 후 제가 저의 신앙 없음을 깨닫고 저를 바꿨습니다.
그분이 저와의 관계에서는 동창이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시지요.
어떤 어린이 교육법에서 어린이를 그저 철부지로 보지 말고
그 안에 있는 신을 보라고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그 교육 성공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가정 안에서
아들을 나의 자식으로만 보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 보고,
남편이나 아내를 나의 반쪽이나 거들짝으로만 보지 않고 신으로 보며,
우리 수도생활 안에서 아주 단점이 많고 고약한 형제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예언자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은 행복할 것입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은 저의 투사라는 것을 알아들은
후로는 저도 모르게 무엇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으면서 유리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며 저의 투명성에
확신을 갖는 어리석은 오만함.....지금도 여전히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뒤 늦게야 알아차리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경우를 허다하게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다.
제 마음의 거울을 투명하게 닦아 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할 수 있을 때 상대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우리 가정 안에서
아들을 나의 자식으로만 보지 않고 하느님의 아들로 보고,
남편이나 아내를 나의 반쪽이나 거들짝으로만 보지 않고 신으로 보며,
우리 수도생활 안에서 아주 단점이 많고 고약한 형제를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신 예언자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은 행복할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제 눈 청소를 부지런히 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는 순간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