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오늘의 우리를 반성케 합니다.
목자는 목자대로 반성을 하게하고,
양들은 양들대로 반성을 하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군중들을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왜 목자가 없습니까?
목자가 있었으되 목자다운 목자가 없었다는 뜻이며,
지금도 목자는 많지만 목자다운 목자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목자가 목자답지 않은 목자일까요?
먹일 생각은 않고 (양을 잡아) 먹을 생각만 하는 목자,
비위에 안 맞으면 양을 두들겨 패는 목자,
양을 잃어버리고도 ‘까짓것 한 마리!’하며 찾지 않는 목자,
몸에서 양 냄새는 나지 않고 향수 냄새만 나는 목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이런 얘기를 했지만 저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러분 안 계실 것이고,
주님께서 오늘 대한민국에 오셔서 목자 없는 양들을 보고 가엾다고 하실 때
‘김 찬선 너만은 예외다’고 하실 리 없으시고,
‘너부터 목자답고, 너부터 잘해라!’고 하시겠지요.
그러니 제가 누구보다 뉘우치며 더 노력해야겠지요.
다음으로 양답지 양에 대해서도 반성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외딴 곳에서 쉬시려는 주님께 군중이 몰려드는데
주님을 성가시게 하면서까지 군중은 왜 그리 몰려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군중을 배불리시는 얘기의 앞 장면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군중의 배를 채우시기 전에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군중을 가여워 하셨는데
배고픈 군중이 가여운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많은 군중이 가여웠던 겁니다.
사실이지 우리는 깨닫지 못한 것이 더 가엾다는 것을 모르고
먹을 거 없는 것이 더 가엾다고 생각하는 가여운 존재입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세상물정 모르는 배부른 소리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뭘 모르고 배불러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하루 세 끼를 다 먹어본 적이 거의 없던 어린 시절을 살았기에
저는 배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러운지 압니다.
그런데 나이를 조금 더 먹어 사춘기가 되면서 더 괴로운 것은
이 고통스런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그것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데 왜 고통이 있는지,
하느님은 선하시다고 하는데 왜 세상에 악이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해 방황하고, 괴로워하고, 자살도 시도하고,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수도원에도 들어왔지만
10년 가까이 방황을 하다가 수도원을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 방황의 기간 이 종교, 저 종교 기웃거리고 이 책, 저 책 뒤지다
마침내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수도원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수도원이 아니라 오히려 밖에서 그 이유를 찾은 것인데
사실은 밖이 아니라 복음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았습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는 있는 행복의 가르침이 마르코복음에는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빵을 배불리 먹이시기 전에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는데
주님께서는 아마 여기서 빵보다 더 귀한 이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고,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근원적인 문제, 곧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빵보다 주님의 가르침을 더 목말라 하는 양들이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