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 창세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요구에 의해
아브라함이 자기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자연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느님은 이토록 가혹하신 분이신가?
하느님은 진정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그런가 하면 오늘 두 번째 독서와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외 아드님마저 우리에게 아낌없이 바치신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상호봉헌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당신 아들을 봉헌하시고
우리 인간도 하느님께 아들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의 봉헌이 더 대단한 것인지에 대한,
곧 하느님의 봉헌이 인간의 봉헌보다 더 위대하다는 식의,
그런 유치한 얘기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봉헌의 위대함보다는
하느님 봉헌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진정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과 희생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가학적으로 즐기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시고 너무 아파하시기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을 우리에게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느끼는 우리도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사랑으로 봉헌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죽기까지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만큼 아픈가 봅니다. 제 작은 경험으로도요.
안도현의 "연어"에서 눈맑은 연어가 은빛 연어에게 한 말이 떠오릅니다.
"네가 아프지 않으면 나도 아프지 않은 거야"
이런 사랑할 수 있음도 은총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고요..., 사랑은 억지로 할 수는 없으니까......요.
글구 일방적인 강요도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줄 수 있는 그 무엇이기때문이지요.
문제는 누가 먼저 할 것이가......인데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때문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받은 것이 있다고 느껴져야 줄 수 있는 마음도 생기기 때문이지요.
사랑하는 만큼 아프고 아픈 만큼 사랑한다는 거.... 제 작은 경험으로는요.
"그래서 이 사랑을 느끼는 우리도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을 사랑으로 봉헌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