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사순 1주 토요일 복음은 마태오복음으로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으로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이는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와
“나 주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나에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레위기의 말씀들을 마태오와 루카 복음사가가 나름대로 바꾼 것일 겁니다.
아무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을 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묘사하고,
우리도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은 완전하신 하느님보다 훨씬 친밀하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풍성하며 인간미를 풍기게 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시고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은 왠지 완벽주의적인 것처럼 들려서
우리를 숨 막히고, 경직되고, 날카롭고, 까다롭게 만들 것 같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저의 수도생활 초기 10년은 이 완벽주의 때문에 망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말을 잘 쓰지 않지만 제가 수도생활 시작할 때만 해도
수도자들은 완덕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가난을 청빈이라고 했는데 저는 청빈의 덕에 집착을 했지요.
프란치스코 하면 가난뱅이라고 했기에 청빈에 더 집착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제가 왜 청빈을 추구하지 않고 집착을 했다고 하느냐 하면
바로 제가 완벽주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완벽주의 때문에 지금하고 비교하면 매우 가난하게 살았지만
프란치스코하고 비교하면 너무도 가난하지 않은 저였기에
그런 저를 용서할 수 없었고,
저만이 아니라 가난하지 않은 형제들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완벽주의에 머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심판하지 마라.”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라고 말씀하셔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 안에는 늘 자신과 형제들에 대한 불만, 미움, 분노가 있었고,
급기야는 나 같은 놈은 수도생활을 할 자격이 없다고 절망케 되고,
그래서 결국 수도원을 떠나게 되었지요.
수도원을 나가서 방황을 하다가 복음을 통해서 저의 잘못에 대해 깨닫고
하느님과 수도원의 너그러움 덕분에 다시 수도원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때 저는 완벽주의적인 완덕은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니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완벽주의란 사랑이 결코 아니고 그저 욕심이고 집착일 뿐입니다.
그리고 저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완벽주의는 완덕에 나아가게 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포기케 만듭니다.
완덕은 사랑에서 가능하고 은총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완덕을 사랑해야 완전에 집착치 않고
자신에 대해서 겸손해야 은총을 받아 완덕을 추구하지요.
그러므로 이제 저는 완전하신 하느님을 믿지 않고
사랑이신 하느님, 자비하신 하느님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저도 사랑하고
좋은 의미에서 저에게 너그럽고 자비롭겠습니다.
저한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도 그러하겠습니다.
굳이 완전하겠다면 마태오복음이 의도하듯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갈망하고 닮으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