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현명하게 대답하는 율법교사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칭찬받는 율법 교사를 보면서 한 편으로는 부러움을 느끼며
동시에 나는 하느님 나라에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 말씀을 잘 뜯어보면 사랑에도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어떤 사랑이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에 덜 또는 더 가까이 있습니다.
첫째가는 사랑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와 제일 가깝다고 할 수 있고,
둘 째 가는 계명으로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
이웃 사랑이 그 다음으로 가깝고
자신을 사랑하는 게 하느님 나라와 제일 멀리 있는 거라 할 수 있는데
그런데 이 말씀을 더 잘 곱씹으면 자기를 사랑치 못하면
이웃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니 자기 사랑이 이웃 사랑의 기초인 게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 멀리 있지만
이웃도 사랑하게 하는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 못지않게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 사랑은 사랑이 그만큼 작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크기가 자기 아닌 누구를 사랑할 수 없는 정도지요.
사랑이 크면 클수록 전 세계 모든 사람을 다 품고 사랑하지요.
그러니 자기만 사랑하는 사랑은 그 그릇이 그만큼 작은 것이고,
자기를 사랑하는데도 급급할 정도로 작은 사랑인 것입니다.
어쨌든 자기를 사랑하듯이 이웃까지 사랑을 하게 되면
이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되 가까운 이웃뿐 아니라 먼 이웃까지 사랑하고,
고마운 이웃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할 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며,
모든 사람을 사랑할 때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 사랑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랑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간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의 사랑도 어떤 때 인간적인 사랑에 머물 때가 있습니다.
Humanist인본주의자의 Humanism인본주의적인 사랑인 것이지요.
그런데 인본주의자들 중의 상당수가 인간을 사랑하지만 무신론자로서
하느님의 사랑도 거부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도 거부합니다.
사람을 근본 삼으니 하느님을 근본 삼는 신본주의를 부정하고
사랑만을 사랑하니 하느님 사랑을 부정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 우리,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사랑 받기 원하는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꽤 가까이 있는 것이며 이런 나를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만족치 말고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사랑을 갈망하는 것에서 사랑하는 것에로 나아가고
마음을 다하는 사랑에서 목숨을 다하는 사랑에로 나아감으로써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사랑을 해야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은 우리,
그러나 더 가까이 가야할 우리임을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 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자신 안에 사랑의 체험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왜냐하면 내안에 사랑의 체험이 없는 메마른 정서로 어떻게 이웃에게 사랑을 전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만 말씀하셨지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굳이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이미 알고 계셔서가 아닐까....
하느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고 깨달은 사람은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중심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싶지요.
이론은 이렇게 정리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한결같이 이런 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저의 삶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저에게는 멀게만 느껴지는 사순시기입니다.
그러니기도해야겠습니다. 불쌍한 제 자신을 위해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