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제자들이 믿지 않음에 대해 꾸짖으십니다.
그런데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인지 생각게 됩니다.
믿지 않았다기보다는 믿지 못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믿지 않음과 믿지 못함의 차이는 의지와 능력의 차이입니다.
믿지 않음은 믿지 않으려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지만
믿지 못함은 믿으려고 하는데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적대하는 사람이 말하면
그가 무슨 말을 하건 곧이듣지 않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말하면
그가 말하면 따지지 않고 무조건 믿으려는 의지가 작동을 하지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여자라고 해서
그녀의 말을 무조건 믿지 않으려고 했을까요?
시골로 가는 다 두 제자의 경우는 자기들을 배반하고 떠났다고 해서
제자들은 다른 두 제자의 말을 무조건 믿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닐 것이고,
그런 것이 아니라면 마리아와 다른 두 제자 때문에 불신한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 불신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불신한 것이지만 믿을 수 없어서 불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무나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그저 무조건 믿으려고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며,
믿기 위해서는 믿을 수 있는 힘,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선은 끈질기게 의심 또는 불신을 하는 것입니다.
웬만큼 의심하다가 대충 믿으려고 해서는 안 되고,
끈질기게 의심하고 불신해야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끈질기게 의심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그 문제를 잡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깨닫기 위해 의심을 하고,
의심을 크게 하기 위해 화두를 붙잡으라고 하지요.
그리고 화두를 끈질기게 붙잡고 매달리는 능력을 근기根機라고 하고,
화두를 끈질기게 붙잡고 의심하는 사람을 근기가 뛰어난 사람이라 하지요.
아무튼 이렇게 대단한 의심과 불신을 처절하게 통과한 믿음,
커다란 의심과 불신을 이겨낸 믿음이라야 큰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불교 방식이고 우리 그리스도교 방식은
우리 인간의 끈질긴 노력에 하느님의 은총이 따라야 합니다.
어제 봤듯이 우리 인간의 끈질긴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때
그때 하느님께서 마침내 등장하시고 믿음을 완성해주십니다.
구약의 야곱이 인간적으로 많이 부족하고 야비한 존재이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하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의 열두 아들에서 비롯된 것은
바로 그의 그 끈질긴 하느님과의 씨름 때문이었지요.
야뽁강을 건너기 전 그는 하느님과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새벽이 되어 하느님이 이제 그만 하자고 해도 축복을 해주지 않으면
놔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텨 드디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습니다.
제 생각에 부정적으로만 보면 제자들은 오늘 주님께서 꾸짖으시듯
마음이 매우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고
그래서 믿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믿기 위해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한 야곱들이죠.
오늘 마르코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바로 그런 제자들에게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주시는데
꾸짖음과 사명의 부여 사이에 분명히 다른 복음들에 있었던 것처럼
제자들의 끈질긴 믿음 싸움, 깨달음, 만남의 체험 같은 것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직 완전히 믿지 못하는 우리도 자신에 대해 너무 실망치 말고
제자들에게서 희망과 본보기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